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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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4-02 21:21
연피정 강론(크리스찬 아빠스)- 하느님을 만나는 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304   추천 : 0  
   2003년 종신 서원자 연례 피정.hwp (162.5K) [132] DATE : 2008-04-02 21:21:39

2003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종신서원자들을 대상으로

독일 슈바이클베르그 수도원의크리스챤 아빠스님께서 강의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을 받아 적어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문맥이 이상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이 너무 좋아서 읽다보면 너무나도 편안하고 희망을 갖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하느님 만나는 길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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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종신 서원자 연례 피정]

지도 : 슈바이클베르그 수도원 크리스챤 아빠스

기간 : 2003년 9월 22일 - 27일

 

[첫째 날(22일) 강의]

이렇게 초대해 주신 것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사실 규칙서 안에서 피정에 대해 이야기 하시질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피정이란 개념이 오늘날과 같지 않았습니다. 피정은 로룔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처음으로 만들었습니다. 30일 간의 피정이죠. 베네딕도 성인 이 말하는 피정이 있다면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의 40일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규칙서 49장에서 이 사순절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40일 동안 따로 피정을 할 수 없는 여건에 있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영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회개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피정 기간은 너무도 짧습니다.

사실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한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그러나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한 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주어진 피정 시간이 너무도 짧고 소중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독일어로 피정이란 단어의 의미 안에는 “연습, 훈련”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군대스러운 용어이죠! “연습, 훈련”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학교는 ‘배우는 것’을 연습하는 시간입니다. 체육이나 예술도 오랜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영성생활도 오랜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기도, 영적 독서, Lectio Divina 모두 연습을 필요로 합니다.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습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묵상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보면, 한두 번 후에 포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노력과 연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구약의 현인들도 일상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의 율법을 되뇌었습니다. 연습과 훈련입니다. 고대의 수도자들도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되뇌었습니다. 연습과 훈련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수도자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되뇌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몇 가지 연습의 원칙들을 제시하겠습니다.

 

1) 되풀이, 반복

 

2) 교정

 

3) 심화

 

연습할 때 나 혼자만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연습은 수행의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그리고 연습으로 우리는 치유되기도 합니다. 연습을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맺어집니다.

또한 연습은 참으로 베네딕도 회원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원을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원”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겨 쓰는 meditare 라는 말은 본래 연습이란 뜻입니다.

피정의 중요한 뜻은 “연습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피정에서 연습을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1)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라 : 탈출해야합니다. 일에서 떠나야 합니다.

 

2) 고요함을 유지하라 : 고요함은 움직이지 않는 것, 가령 잠잠한 바다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조용함은 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소리가 없는 것이죠. 침묵은 우리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요함과 조용함, 침묵 속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마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마음의 소리들 듣도록 하십시오.

 

3) 깨어 있으라 : 의식하고 느끼십시오. 머리나 손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관으로 모든 것을 감지해 보십시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촉각을 느끼고, 맛보고.... 그래서 산책을 많이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산책하면서 생각을 많이 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감각을 체험하십시오.

무엇인가 떠오르기도 하고, 발견하기도 하고 하면서 자유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4) 성서 이외에는 아무것도 읽지 마십시오. 필요한 것은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5) 인내를 가지십시오.

 

 

 

[둘째 날(23일) 강의 - 오전]

 

주제 : 시작

 

영성 생활에서 시작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일화) 고대 사막의 한 스승이 죽기 직전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왜 우시옵니까?” 라고 물으니 스승이 대답하였습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야 하니 이렇게 우는 것이라네!”

우리는 날마다 “시작”하며 살아야 합니다.

 

1. 성서에서의 “시작”

창조 이야기,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 선조들의 족보, 예언자들의 소명 사화, 이름에 대한 이야기들 등이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복음 낭독시 “그때에”라고 하는 것도 “시작의 때”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시작하는 이들의 하느님이시고, 초심자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시작을 보십니다.

 

2. 전례에서의 “시작”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선사하십니다. 성탄 시기, 성모 축일들, 사순절 전례도 시작을 의미합니다. 전례주년은 한 시작에서 다음 시작으로 넘어 가는 것입니다.

 

3. 성 베네딕도 규칙서에서의 “시작”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 마지막 73장에도 이 규칙서가 시작하는 초보자를 위한 기초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시작”이란 단어는 규칙서의 주된 테마 중에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전례에 관한 장에서 새벽기도를 시작할 때 시편을 아주 천천히 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함께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베네딕도는 좋은 시작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베네딕도는 완전한 수도자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시작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교회의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죽기 위해 로마로 압송되면서 “이제야 비로소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치쁘리아노도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세례를 중요한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지금 유럽 교회는 세례를 통한 새로움 시작에 대한 의식이 없습니다. 대부분 유아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들의 서원의 세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2의 세례라고도 합니다. 수도승들은 세례라는 시작에서 사는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세례는 끝나지 않는 시작입니다.

 

4. 우리 삶에서의 “시작”

우리 삶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시작”이 나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시작”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나의 성소는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시작에 대한 체험은 강하게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긍정적인 체험, 부정적인 체험, 기쁨, 슬픔 등으로 말입니다.

한 달 전에 오지리에서 한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교황님께서 오지리를 방문하신 것은 저에게 회개와 수도 성소를 시작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 시작의 경험이 있습니다. 시작의 경험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억”은 중요합니다. 성서에도 “기억하라”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시작은 우리의 뿌리이며 기회입니다. 기반이 됩니다. 모든 시작은 어떤 선물입니다. 모든 시작은 어떤 약속입니다. 모든 시작은 어떤 초대 입니다.

위기에 직면할 때 “시작”을 기억함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끔 수도생활을 그만두는 형제를 보게 됩니다. 그만둘 때 대부분 자신의 시작이 “착각”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입회할 때보다 정확합니까! 성소를 포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시작을 잊어버렸거나 소홀히 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작 안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시작의 중요성을 자각해야 합니다. 시작은 항상 방향을 지향합니다. 나아가야 합니다.

((권고))

1) 시 139(8) 묵상 하십시오.

2) 자기 인생의 “시작 역사”를 기록해 보십시오(큰 시작, 작은 시작).

 

 

 

[둘째 날(23일) 강의 - 오후]

 

주제 : 길

 

우리 인생은 하나의 “길”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생명의 길, 장막에 나아가는 길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고속도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길을 닦기 위해서는 먼저 책상에 앉아 계획하고 설계합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고속도로는 같은 모양입니다. 경치와 환경에다가 억지로 길을 낸 것입니다. 그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질적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길”은 고속도로와는 그 개념이 다릅니다. 외딴 곳에 가면 자연과 어우러진 길을 만나게 됩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길은 바로 이런 길입니다. 걸어가는 길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길을 찾아야 합니다. 때로는 길을 터야할 때도 있습니다. 표지판도 필요합니다. 여기서의 표지판은 고속도로의 표지판과는 다릅니다.

길은 여러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똑바른 길, 경사길, 내리막길, 오르막길, 굽은 길, 험한 길, 평탄한 길, 오솔길 등등.. 길은 본래 고속도로와는 달리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지 않고는 이런 길의 개성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길마다 각각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서로 다른 것처럼 길도 서로 다릅니다.

성서나 규칙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길에 대한 다양한 표상을 사용합니다. 길에 대한 다양한 표상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1) 길은 ‘걸어가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평범한 사실입니다. 길은 본래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로 걸어가면 수고스럽고 땀이 나며 피곤해집니다. 길은 나 지신이 스스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길을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갈 수 없습니다. 길을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길을 나아가는 것은 “책임과 자율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우리 스스로 걸어가며 우리 스스로 주관해야 합니다.

‘나의 길은 어떻게 형성되고 있습니까?’

우리 삶의 길은 처음부터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숙명이 아닙니다. 우리의 각자의 삶의 길은 자신의 자유와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형성된 결과 입니다.

자신의 길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자신이 가고 있는 길과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순례자들의 생각해 봅시다. 순례자들은 서원이나 성전에 나아가면서 자신과 자신의 길과 대화를 합니다. 이런 교환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인생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풀려 집니다. 자신의 삶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각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내려야할 결정을 미루지 마십시오. 나의 가능성, 힘, 능력은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회개를 미루지 마십시오. 걸어간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2) 길에는 ‘이정표’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에서 이정표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함입니다. 계명은 길을 찾기 위한 하느님의 초대이며, 도움입니다.

이정표는 우리 길의 올바른 지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십니다. 우리 인생 여정은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와 선택이 있습니다.

 

3) 길에는 ‘안내자’가 있습니다(지도자).

우리 인생길에는 좋은 표양을 전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은 인생을 훌륭하게 완성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길을 물론 복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오직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길이 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길이며 완전한 안내자이시고 우리를 앞서 가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가도록 초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인생길은 하도 크고 넓어서 우리에게 크나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길은 우리 인생에서 어떤 것이 결정적인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 안에 가장 높은 자유와 위대한 순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도 그분과 같이 하느님의 뜻을 찾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4) 길에는 ‘좋은 선물’들이 있습니다.

길을 걷다보면 과일 나무나 산새들의 소리, 맑은 개울물 등 작은 선물들이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길에서도 우리는 크고 작은 선물들을 받게 됩니다. 인생의 가장 좋은 선물은 경험입니다.

나의 길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좋은 길은 스스로 보호와 안내를 받으며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좋은 길은 원만한 것입니다. 나이 많은 형제들을 통해 우리는 이 길의 좋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 성숙한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보면 이 길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약속한 것을 받을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좋은 선물입니다.

친절, 착함, 도와줌, 유머..등의 선물을 선배나 동료들에게서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길은 지루하지 않기도 합니다.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추어 쉬는 것도 필요합니다.

바라보고 머물러야 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기쁨과 고마움을 이 길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 길에 대한 좋은 성서 구절을 꼽으라면 “시메온의 노래”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메온을 통해 이 길의 끝에 희망의 별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길에는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도 시메온처럼 구원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권고))

1) 시 119(8)를 묵상 하세요.

2) 지금까지 나는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셋째 날(24일) 강의 - 오전]

 

주제 : 샘

 

길에는 샘이 있습니다. 우리 영성 생활에도 샘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샘, 그리고 개인적인 샘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고유한 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 문화, 종교를 보면 샘이란 개념을 굉장히 기본적이 개념입니다. 성지에 가보면 흔히 우물이나 샘이 있습니다. 샘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입니다.

샘은 우리에게 하나의 선물입니다. 샘은 신들이 거주하는 장소와 연관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방의 종교만이 샘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샘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당신께 생명의 샘이 있나이다(시36,10).”라는 시편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우물가에서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도 샘-물의 중요성을 말해 줍니다.

 

그렇다면 샘이란 무엇입니까?

1) 샘은 어떤 것의 원천입니다. 어디에서 나오는지 말해줍니다.

2) 샘은 어떤 순수함, 진정함과 연결됩니다.

3) 샘은 충만함과 생생함, 깨끗함과 연결됩니다.

4) 샘은 넘겨준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샘이 고여 있으면 썩게 됩니다.

넘겨줌으로써 샘 자체가 새로워지고 신선해 집니다.

우리의 영성 생활에도 꼭 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약을 통해 새로운 샘의 개념을 얻게 됩니다. 목마르지 않게 되는 물을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연인에게 약속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샘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이의 마음에 있는 샘은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샘은 바로 마르지 않는 샘이신 “성령”입니다. 물이나 샘은 성서에 나오는 성령이나 성령에 대한 우리의 체험을 표현한 용어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진정한 샘은 또 다른 샘을 솟아나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성생활에서의 샘은 바로 ‘성령의 샘’입니다. 영성의 샘들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샘들입니다. 성령께서 이 샘들을 솟아나게 해 주십니다.

영성생활에는 샘들이 꼭 필요합니다. 탁한 물, 더러운 물도 있습니다. 나쁜 강이나 개울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생활에도 더러운 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으로 말미암아 정화시켜 진정하고 생생한 물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에도 좋지 않은 샘들이 있습니다. 열심이란 단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샘은 아닙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진정한 샘-원천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원천이 아름다고 맑은 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수도자들은 그 샘을 하느님의 말씀과 전례, 기도, 전통(경험) 등에서 찾아야 합니다.

 

1)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성서의 말씀을 읽고 듣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지금 성서를 읽으며 바로 지금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성서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고학, 사학, 언어학, 종교학 등을 통해 많은 성서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와 성서를 비교하면서 유사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가 다른 종교의 문헌과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임을 믿고 있습니까!

성서의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습니까!

성서의 말씀이 우리의 판단하고 단정하는 칼이라는 것을 믿습니까!

치유하고 도와주는 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배고픔과 목마름을 풀 수 있는 빵과 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성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면 아무도 나에게 해 줄 수 없는 말씀을 찾게 됩니다. 성서는 바로 위에서 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성령의 눈과 귀로 듣고 읽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Lectio Divina 라는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독의 방법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성독은 하느님 말씀의 영적 힘을 믿고 있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성사와 비슷한 효력을 지닙니다. 말씀과 사귀십시오!!

 

2) 전례(Opus Dei)

전례는 하느님의 일(Opus Dei)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과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하는 일(찬양)을 포함합니다. 전례는 결코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전례를 통해 우리 구원과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전례의 핵심은 십자가 위해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현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아버지께 전례를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예배를 반영합니다. 전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만져 주시고, 우리도 주님을 만지고 그분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전례를 아름답게 거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성찬례를 아름답고 엄숙하게 거행하도록 하십시오. 전례를 관상적인 마음으로 지내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3) 기도

기도는 우리 수도자의 주된 소명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 자체가 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풍요로운 세계를 더욱 잘 발견해 나가야 합니다. 기도의 방법은 참으로 많습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 마음으로 하는 기도, 관상적인 기도, 침묵의 기도 등등.. 하지만 많은 방법 안에서 우리는 기도의 정신, 기도의 영을 더욱 잘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언제나 기도의 영입니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을 통해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대표적인 기도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기도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묵상과 관상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성서도 중요합니다. 성서는 성령의 말씀입니다. 성서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해서 성령의 말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내적인 기도 혹은 마음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수도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이러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소에 포함되어 있는 고귀한 보물입니다. 신비한 기도입니다. 영과 함께 하는 신비의 기도는 믿는 이들에게는 누구나 자연스러운 기도입니다.

 

4) 전통(경험)

전통은 삶에 대한 지식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전통들이 있습니다. ‘규칙들, 교부들의 생활, 여러 문헌들...’ 이러한 것들에는 귀한 진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접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순교자들의 교회에서 이런 원천들(전통)이 오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열정을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열정은 수도승 생활로 이어졌습니다. 수도승들 안에서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통의 샘들은 대단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도 교부들은 치유자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심리 치료사들은 이런 점들 때문에 수도 교부들의 문헌을 공부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주님의 말씀이 몸과 마음을 낫게 합니다. 이러한 전통을 새롭게 발견하고 현대의 우리의 삶과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5) 그 외에도 개인 안에는 여러 샘이 있습니다.

다양한 신심행위(묵주기도, 십자가의 길), 예술, 음악 등등..

영성 생활의 샘을 찾으십시오.

 

((권고))

1) 나의 영성생활의 샘은 어디에 있는가?

내 영성 생활의 원천은 어디인가?

하느님께 대한 나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2)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읽고 묵상하십시오(요한 4,1-15).

 

 

[셋째 날(24일) 강의 - 오후]

 

주제 : 우리의 중심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심”이란 사는 자리와 연관이 있습니다. 변두리에 설 수도 있고, 중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 지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중심”이란 원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입니다. 모든 원이나 거리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중심”에는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중심은 각 극에서 같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도 중심이 있습니다. 몸과 영의 양쪽의 중심, 물질과 정신의 중심, 이성과 마음의 중심, 안과 밖의 중심, 수동과 능동의 중심 등등..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항상 그 한 가운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심은 힘이 있습니다. 단단하고 고정된 것입니다. 중심에서 척도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베네딕도 회원에게는 이 중심의 우리의 소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중심에 대한 덕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중용”입니다.

“중용- 중심이 덕행, 정도의 덕행”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돌아가신 후 랑고바르트족이 몬떼까시노 수도원을 침입하여 파괴했습니다. 이때 수도자들은 피신을 하면서 다급하게 두 가지 물건만을 가지고 나왔는데, 이 두 가지 물건은 바로 “수도 규칙과 포도주의 양을 재는 그릇”이었습니다. 포도주의 양을 재는 그릇이란 말에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수도자들에게 “측정하는 것, 올바르게 재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중심을 잡는 일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나는 중심의 인간, 중심의 수도자입니까!

나는 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실 중심은 자신의 모든 삶, 모든 신앙생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심을 잡은 수도자는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중심을 잡은 수도자는 극단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잡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한 것이 아니고 되어 가는 것입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중심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

 

1) 중심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중심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베네딕도 성인을 ‘중심을 찾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와 함께 살았다”고 베네딕도 성인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찾는 수도자, 참 자아를 찾는 수도자는 바로 중심의 수도자입니다. 중심을 찾기 위해서는 고요와 침묵, 명상을 실천해야 합니다. 중심을 잡은 수도자는 그 중심에서 힘을 얻습니다. 기도와 일을 할 때에도 이 중심에서 힘을 받습니다. 중심이라는 것은 생기 있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더 중심의 수도자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현대에는 중심을 잡은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 때 입니다. 중심을 잡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방이 많이 있는 여관과 같은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로 효과를 나타냅니다. 우리 베네딕도 수도원의 “정주”라는 개념도 그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중심은 우리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공동체의 각 회원이 중심인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회원들이 하느님과 연결이 잘 될수록 공동체가 훌륭하게 되어 갑니다. 하느님과의 연결을 회원 상호간의 연결도 원활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공동체의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중심 안에 살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계속 우리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중심에 대해 소홀할 때 공동체라는 원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중심에 살기 위해 노력할 때 원의 중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잇습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를 공동체의 중심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개인들이 중심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가 시선을 가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좋지 않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원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 그 공동체는 잘 돌아갑니다. 중심을 향한 건전한 생활양식이 필요합니다.

“중용”이야 말로 우리 공동체의 참다운 생활양식입니다.

 

3) 우리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과의 관계는 우리 신앙과 관계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살아 있는 관계로 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노력과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머리로써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알아가야 합니다.

나는 어디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씀과 사귀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많은 부분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비유를 보면 비유를 말씀하신 분에 대한 어떤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성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학력이 없었습니다. 지성인이 아니었습니다.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관찰을 잘 하신 분이었으며 자연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상황, 직업, 인생의 모습. 인간의 종류 등을 굉장히 정확하게 관찰하셨습니다. 그런 관찰력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비유는 종교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이야기에서 하느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짧은 말씀을 택하여 하루를 살아 보십시오. 그 하루에 벌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을 이 한마디로 서로 연결시켜 보십시오. 그러다 보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다 깊이 알기 위한 또 하나의 길은 “흠숭”의 길입니다(성체조배는 흠숭의 시간입니다).

비안네 성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성체 앞에 몇 시간 동안이나 오랫동안 조배하는 농부를 보고 비안네 성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그분이 나를 바라보시고, 내가 그분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바오로 사도의 필립비서 3장의 내용을 기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는 것-그리스도를 사로잡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사람을 잡아당기십니다. 그분에게 당겨지도록 자신을 내어 놓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을 갖게 된다면 사람이 중심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 수도승들 역시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참 중심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가 이 중심의 사람인지 아닌지는 다른 사람이 보고 먼저 알 것입니다. 우리 생활들, 우리의 증거들, 우리의 열매는 중심과의 연결에 달려 있습니다.

 

((권고))

1) 필립비서 3,7-14를 묵상해 보십시오.

2) 내 생활 안에 하느님께서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파비아나 09-07-0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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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평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늘 행복하세요.
카타리나 09-08-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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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당신께서는 저를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 중심에 당신이 아닌 자녀의 근심을 해결하려는 저의 마음이 있음을 ...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당신을 찾으려는 저의 마음에 오소서.당신의  성령을 보내소서. ..  이  긴 터널의  중간에서  빛이신 당신을 그리며..  제 중심에 오소서/  아멘.
은혜로운연꽃 11-11-0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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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시니 ...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걷도록 항상 기도와 묵상을 하겠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Michelle Paek 12-06-22 06:51
답변  
+  찬미 예수님 !

이 글을 읽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