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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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09 11:21
박석희 주교님의 피정노트 - 기도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기>
 글쓴이 : Ans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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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기>

 

사람에게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알린다는 뜻이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에는 사람에게 무엇을 청할 때와는 다르다. 하느님은 내가 청하기 전에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알린다는 일은 필요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처하는 것은 기도를 실천하는 역할 중의 하나이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무슨 일에나 기도와 간구로써 감사하며 여러분의 요청을 하느님께 알리시오.”(필립 4,6)

 

이것(청하는 것)이 기도하는 양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수없이 많고 그 중에는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많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많아도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무리 많든 나는 동일한 한 가지 양식(주님의 기도)으로 하느님께 청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 26-27)

 

어떻게 기도할지를 모를 때는 성령께 기도를 맡길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에는 사람에게 무엇을 청할 때와 같은 양식을 사용하지만, 서로 다르다. 하느님은 내가 무엇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에 함께 나열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에게 항구하게 무엇을 청하는 것과 하느님께 무엇을 항구하게 청하는 것도 다르다. 사람에게 항구하게 청하면 결과를 볼 수 있다. 하느님께 항구한 것은 경험적으로 결과를 못 본다. 이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항구하라는 가르침이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 것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기도 실천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응답된 기도 : 응답의 두 가지 의미>

 

응답의 말과 행동이 동시에 있는 응답과 말없이 그냥 응답하는 행동만 있는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할 때에 일상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청하는 것과 주는 것(응답)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 선의로 주시는 것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실 때에 그것이 나의 요구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것과 청하지 않는 것에 별 관계없이 어떻게든 주신다. 그러면 왜 청하는가? 나는 무엇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에 기도했고, 그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이 자연적 현상이라도 정상적으로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주는 방식과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는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람이 나에게 주는 방식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 청하고 받는 것은, 하느님께 청했고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하느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었는가 안 들어 주었는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내 기도가 응답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라는 어떤 분이 꼭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 기도가 들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것뿐이다. 그럴 때 나는 내 기도가 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기도할 때는 그 특정한 행위자가 행동을 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단순히 받기를 바라는 것,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청한 것과 유사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또 하느님이 바로 그러한 일의 행위자로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 특정 교파의 사람이 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한다고 하자. 그는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치유를 주장하고 의사의 치료를 거부했을 때 아들이 다행히 살아났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게 이 사건은 기도의 응답이고 하느님이 자기 아들을 살려 주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으로서 자기 아들을 살려낸 것을 확증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확증할 수 있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치료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기도한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셔서 나에게 무엇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특정의 행위자가 그것을 나에게 주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이비 종교는 하느님을 자꾸 어떤 행위의 행위자로 상정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하느님이 한 행위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 행위자인 어떤 분, 행동하는 어떤 분은 아니다. 하느님은 영적인 행위자(Spiritual Agent)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나는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청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여 하시는 것은 어떤 분에 의해 행하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이다.

 

 

<쌀을 위한 기도>

내가 스테파노에게 쌀을 달라고 기도했고 쌀을 받았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일어났고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하느님께서 뒤에서 스테파노의 마음을 변화해서 쌀을 주게 했다고 추론한다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만들 수 있다.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행동, 즉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면 우리는 그 개념을 결코 바르게 사용할 수 없다. 영감을 이야기하는 것의 부당성은 영감의 작용은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이고 감지 못하는 상황으로는 그 개념의 정확성을 말하기는 어렵다. 기도의 응답은 추론의 결론이 아니다. 볼 수 없는 분의 볼 수 없는 행동으로 추리하지 말라.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은 볼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거기에 영감을 결부시킨 추론의 결론이 아니다.

 

또 한가지는 우연의 일치를 볼 수 있다. 내가 쌀을 달라고 기도하는 순간에 스테파노는 다른 이유로 쌀을 주려고 할 수 있다. 기도와 동시에 우연한 일치가 일어났다. 이런 우연한 기도의 일치가 기도의 응답으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하느님의 어떤 작용으로 생각하게 되면 기도의 응답에 대한 것이 허무해진다. 그저 일어나기를 바란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그것뿐이다. 특정행위자가 무엇을 했다고 추론하지 말라. 하느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기도의 개념에는 동시발생이라는 개념이 없다. 모든 기도 응답에 대해 우연의 동시 발생이라고 자꾸 의심하게 되면 하느님께 무엇을 청해서 얻을 수 있다는 신뢰의 상실이며, 기도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며, 기도와 함께 인각된 삶의 방실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난 다음에 어떤 특정 행위자를 내세우게 되면 인과율로 연결된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의 응답에는 인과적 관계가 없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어난 그 일과 나와의 관계이다. 그것으로 나는 만족해야 한다. 만족하는 것도 기도하는 신뢰가 강할수록 기도의 응답에 대한 만족감도 크다. 기도의 체험이라는 것은 기도에 얼마나 신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단순한 자가 가장 행복하다.

 

<틀린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