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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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10 21:14
시몬 아빠스님 강의,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 (3)하느님의 모상
 글쓴이 : 김영진
조회 : 155   추천 : 0  

(인간, 하느님의 모상)

창세기 1, 2장에 두 가지 창조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갈라놓고, “빛이 생겨라말씀하시자 생겨납니다. “보기 좋더라하시고, 다음날 생겨나라하시자 생겨납니다. “보기 좋더라.” 이렇게 다 말씀하신 다음, 마지막 날은 당신이 말씀하시지 않고, 손수 진흙을 빚어서 사람의 꼴을 만든 다음 입김을 불어넣으십니다(창세기 2, 7). 혼을 불어넣습니다.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模像)’ 무슨 말인지 아세요? 무엇이 하느님의 모상인가? 무엇이 닮은 꼴 입니까? 다른 것은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유독 인간만은 하느님께서 손수 빚어서 만드셨고, 거기에 혼, 당신의 생명력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인간은 생각하는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IQ가 높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아는 양심(良心)’이 있습니다. 셋째 인간은 해야 할지, 하면 안 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인간이 하느님과 가장 닮은 모습입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인간을 품위 있게 하는 것은 자유의지입니다

 

(인간의 죄)

이어 나오는 창세기 3장의 인간범죄 이야기는 제가 볼 때, 신학적, 문학적, 심리학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창조하신 후 동산을 만들고, 그 가운데 있는 나무하나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고 하십니다(창세기 2, 17). 마귀가 뱀의 탈을 쓰고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마귀)가 꼬이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기가 막히게 꼬입니다. “하와야 하느님이 이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는 만지지지도 말고,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했다면서? 정말이냐?” 하고 묻습니다. 하와가 아니야 다 따먹되,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만은 먹지도 따먹지 말라고하셨다(창세기 , 3, 3). 따먹지 말라는 말은 맞아요. 뒷부분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적 없습니다. 하와는 전에는 관심 없었는데, 그 나무를 찍어서 말하니, “저 나무는 무엇일까? 다 따먹으라고 하시지, 저 나무만 따먹지 말라고 하셨을까?” 여기에는 호기심과 원망이 깃들어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보다 IQ가 높습니다. 원래 천사출신입니다. 그래서 하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두 번째 유혹,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것은 따먹으면 너희도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가리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그것을 아시고 따먹지 말라고 그랬다.(창세기 3, 5)” 잘 들어보세요. 마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묘한 경쟁 심리를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 별것 아니다. 그것 따먹으면 너희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 둘째 하느님을 치사한 사기꾼으로 만듭니다. 그것 따먹으면 자기처럼 될까봐 금지한 것처럼 말합니다. 물론 성서에 이런 표현은 없습니다.

 

(하느님과 분리, 이웃과 분리, 자신 안 분리)

다음 표현을 봅시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보니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나무열매를 땁니다. 먹고는 남편을 사랑했던지, 아니면 저 혼자 먹으면 안 되니까 혼나도 같이 혼나자, 하는 물귀신 식으로 따서 줍니다. 아담은 군말하지 않고 먹습니다. 먹고 나니 눈이 뜨였습니다. 하느님 보기가 부끄러워 나뭇잎 속으로 숨습니다. 그전까지는 잘 지냈는데, 이제는 하느님을 못 봅니다.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죄가 똑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느님과 분리가 일어납니다. 이웃과 분리가 일어납니다. 자기 자신 안에 분리가 일어납니다. 모든 죄가 똑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있을 수 있습니다.

 

(죄의 회피)

그 다음은 더 기가 막힙니다. 하느님이 보시니 없어요, 안보입니다. “아담아하고 부르십니다. 대답 못하고 쭈그리고 있다가 계속 부르시니, “예 여기 있습니다.” “너 왜 거기 있느냐?” 추궁하시지요. 아담에게 왜 따먹었느냐?”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당신이 짝 지워준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누구를 걸고넘어집니까? 하와를 걸고넘어지는 것 같지만, 하느님을 걸고넘어집니다. 괜히 여자를 만들어서, 여자 아니면 안 그랬을 턴데, 저는 억울한 피해자입니다. 그런 대답입니다. 그럼 왜 하느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줍니까?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서 그의 짝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보고나니, 아이고 내 뼈에서 온 뼈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런데 지금은 저는 억울한 피해자입니다. 하느님은 기가 막혀 대답도 안하십니다.

하와에게 묻습니다. “하와야 왜 따먹었느냐?”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요 꾀에 넘어갔습니다.” 우리도 쉽게 이런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표현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표현입니다. 아담, 하와 모두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있고, 옭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양심이 있고, 해야 할지 안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표현입니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것 안가지고 있습니다. 짐승에 불과합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차라리 제가 하느님의 영을 어기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면 달라집니다. 그런데 빠져나갈 궁리만 합니다. 이 원리를 초등시절 배울 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뒤뜰에 있는 사과 하나 따먹은 것 가지고 얼마나 큰 죄라고 대대로 원죄에 처하니 말입니다. (2)

그런데 이것은 흙먼지에 불과한 인간이 하느님을 배은망덕 하는 정도가 아니고 밟고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에를 들어 친구 따귀를 때렸다고 합시다. 다음날 사과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본당신부님과 이야기 하다가 따귀를 때렸다고 합시다.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주교님이나 교황님과 이야기 하다가 따귀를 때렸다고 합시다. 보통 문제가 아니지요. 그런데 이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흙먼지에 불과한 인간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만들어 주었더니 한다는 짓이 배은망덕 정도가 아니고, 밟고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추방과 첫 복음)

결국 쫒겨납니다. 쫒아내며 말씀하십니다. “너와 여인사이에, 네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원수를 맺어주니, 여인의 후손에게 네 머리를 짓밟히리라(창세기 3, 15).” 교부들은 이 사실에서 여인은 마리아, 그 후손은 메시아로 해석했습니다. 인간구원의 첫 번째 약속이라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첫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구원약속입니다. 쫓겨나는 놈들을 붙잡고 또 사정하십니다. “내가 구해줄게.”

    

(2) 이 대목은 저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완전하게 창조하시고, 죄를 범하니까 추방하시고, 우리까지 원죄로 엮으신 하느님이란 생각으로 젊은 시절, 교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내 마음 안에 이 성향이 분명히 존재하고, 이로 인하여 한없이 악에 빠질 것이며, 그래서 하느님께서 구원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로 돌아왔고, 이 대목에 대한 설명이 있으면 유심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중 아빠스님 설명이 가장 명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