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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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10 00:52
시몬 아빠스님 강의,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 (2)하느님과 만남
 글쓴이 : 김영진
조회 : 141   추천 : 0  

(믿음의 본질)

우리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혹시 예를 들어 몇 달을 기도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뚝 떨어졌어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경상도 말로 치워뿔라이런 식으로 신앙생활 한다면 구복신앙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 하느님을 조정하는 신앙, 이것은 정안수를 떠 놓고 비는 것이나, 성황당에 가서 비는 것이나 일방적인 면에서 똑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관계 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내 뜻만 이야기 하고 내 뜻만 실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아도 이런 기도는 다급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이고 하느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런 기도는 얼마든지 인간이면 바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나, 인격적 만남)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의 인격적 만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만남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인격적 만남에서 하느님이 그 분이 되는 것 아니고, ‘너와 나’ (뜨와 와 므와, 그리스어 Toi & Moi),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남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도시 번화가 명동이라고 합시다. 수많은 사람과 마주칩니다. 그러한 만남은 아무런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수많은 가구가 삽니다. 같은 동 같은 층에 살아도 심지어 바로 옆집 살아도 매일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때는 저사람 같은 층 몇 호실 사람이야그 정도로 지나칠 것입니다. 그것은 인격적 만남이 아닙니다. 혹시 등산할 때 오르는 사람, 내려가는 사람이 서로 인사합니다. 수고하시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정도 인사를 나누겠지요. 혹시 정상이 멀었습니까? 그 정도로 인사하지요. 그런데 그가 힘들어서 그늘진 바위에 앉았습니다. 나도 거기 앉았다고 합시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디서 왔습니다. 아 같은 동네이네요. 그러면서 이야기 하다 보니까 옛날 학교친구일 수도 있고 그러면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습니다. ‘인격적 만남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격적 만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밀접한 만남)

만남에서 중요한 것은 나와 상대방이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를 만났다고 합시다. 10, 2030년 후 아주 친한 친구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때는 서로 얼싸안고 남자들 같으면 술 한 잔 마시며 옛날 놀던 이야기, 누구 골려먹던 이야기, 서로 툭툭 쳐 가면서 배를 잡고 웃고 이야기 나눌 것입니다. 그런데 옛 스승을 만났다고 합시다. 그때는 그런 식은 할 수 없지요. 예의에 맞게 해야 합니다. 혹시 본당신부님이 가정방문 왔다고 합시다. 거기에 맞는 준비와 신부님이 영적으로 물어보시는 것에 맞게 대답해야할 것입니다. 추기경님이나 주교님이 여러분 집을 방문했다고 합시다. 여러분들은 큰 자랑거리로 여길 것입니다. 맞을 준비하고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는데 한국 가정을 보고 싶다하시고, 어느 가정을 방문한다고 합시다. 적어도 한두 달 전에 통보가면, 집수리하고 도배하고 청소하고 무슨 옷 입을까 하고 새로 맞추고 야단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은 추기경님이나 교황님과 비교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런 분과 아주 밀접한 만남 이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나의 존재)

하느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했는데, 나는 하느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하느님은 나에게 어떤 분인가? 이것을 올바로 알아듣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인격적 만남, 그냥 만남이 아니고 인격적 만남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은 너무 큰 문제이므로 나중에 말하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 사순절 이란 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사순첫날은 재의 수요일이지요. 재를 머리에 받는 날입니다. 그 해 성지를 태운 재입니다. 발라주기도 하고, 뿌려주기도 하면서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명심하라’ 고 합니다. 이 말은 주제파악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되돌아갈 것을 명심하라, 즉 주제파악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주제파악을 옳게 하는 것, 내가 하느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깨닫는 것,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이고, 올바로 사순시기를 보낼 수 있는 출발점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격적 만남에서 내가 하느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옳게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90(성가 423)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인간이 하느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시편작가는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 그런데, 하느님은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나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하루살이 같은 풀과 같다고 합니다. 70-80년 산다고 하지만 그나마 고통과 슬픔이오니,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의학이 발달되고 식생활이 개선되어 10년쯤 더 살아서 90년 살더라도 긴 세월에 비하면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불교에서 인생은 찰라(札剌)같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겁(永劫)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란 사방 15 km(1) 공간에 씨 중에서 제일 작은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하나씩 꺼내서 다 빠져 나가는 시간을 한 겁이라고 합니다. 또 그만한 바위덩어리를 100년마다 한 번씩 명주 천으로 문질러서 그 돌이 다 달아 없어지는 시간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겁, 억만 겁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시간에서 70-80년 살아도 찰라이지요. 그 찰라에 살면서 우리는 아웅다웅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살다보면 즐거운 시간도 있고 고통시간이 더 많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 고해(苦海) 라고 합니다. 시편도 그나마 거의 고통과 슬픔이오니그렇게 보면 인생은 허무하지요. 그래서 철학에 허무주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서에서 인간을 어떻게 보는 가?’ 하는 것입니다.

(1) 고대 인도에서 왕이 하루에 가는 거리를 유순(由旬)’ 이라고 합니다. 10 - 15 km 라고 합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