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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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9-27 20:47
'세상으로부터 물러남'(fuga mundi)
 글쓴이 : 허 로무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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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부터 물러남(fuga mundi)


'세상으로부터 물러남'는 수도승 영성의 첫 번째 요소이자 'conversatio morum'의 내용 중 하나이다.


1. '세상'(mundus)의 개념

1)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긍정적 측면) - 선함

2) 죄의 결과로 변해버린 피조물(부정적 측면) - 악함
부, 권력, 명예, 학벌, 쾌락 등 세속적 가치가 지배함.

구원이란 바로 인간 본래의 선한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2.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의 의미

1) 외적의미 - 물리적, 지리적 떠남(세속적 관심사들과 일들에서 자유로와 짐, 고요하고 한적한 곳으로 감)

2) 내적의미 - 정신적 떠남(세속적인 가치들을 포기하고 그것들로부터의 자유로움)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3.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의 이유

1) 하느님 사랑 때문(개인적, 수직적 차원)

수도승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물러난다. 성 바실리오에게 있어 이는 첫 번째 계명(하느님 사랑)을 위해 절실히 요구된다. 수도승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이다. 즉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찾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이다.


2) 이웃사랑 때문(공동체적, 수평적 차원)

세상을 떠나는 것은 다른 형제들을 버리고 또 세상을 등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만이 이 구원에 이바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도원 안에 사는 것은 결코 세상이 실어서거나 우리끼리만 잘 살고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웃과 세상을 더 넓고 깊게 포옹하기 위해서이다.


3) 고독과 침묵을 위해

하느님께 투신하기 위해 즉 기도의 삶을 위해 고독과 침묵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초기 동방 수도승들은 사막과 광야로 들어갔던 것이다. 안또니오 성인은 "사막에서 사는 수도승은 세 가지 전쟁 즉 눈과 입과 들음에 대한 전쟁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이야기하였다. 서방에서는 봉쇄로서 이러한 사막의 고독과 침묵의 전통을 유지하였다. 오늘날 수도원의 봉쇄는 바로 이러한 전통을 잇는 것이며,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이다.


* 봉쇄의 규칙

성 베네딕도는 '밖으로 방황하는 것은 수도승들의 영혼에 별로 유일한 길이 아님'을 강조한다(RB 66-67). 또한 거의 모든 수도생활 쇄신운동은 사막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사막의 고독은 도시나 사회로부터의 지리적인 분리와 봉쇄의 규칙 안에서 구체화된다. 봉쇄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에 물들지 않게 한다'는 소극적 의미와 더불어 '하느님을 더욱 열렬히 찾기 위함'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외출은 진정한 필요성이 있을 때 허락되어야 한다. 친지나 친구들 방문 또는 편지나 전화를 통한 사람들과의 통교는 관상적 삶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봉쇄나 침묵에 대한 습관적인 태만은 C.M 서원을 거스르는 것이다. 장상의 관면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불필요한 일로 밖에 나가는 것은 세속적인 기분전환에 습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으로서, 이는 C.M 서원을 거스르는 것이며 스캔들을 일으키는 잘못이 될 수도 있다. 무절제한 서신교환 및 전화통화 또는 허락 없이 봉쇄구역을 떠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또한 위험스러울 수 있다.


4. 수도승과 세상

수도승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지만 그는 세상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철저하게 세상에 포함되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러한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는 전적으로 세상을 초월하는 인간 생명의 새로운 중심 안에서 가능하다. 이 중심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변형시키는 성부이다. 수도승은 이 새로운 중심으로부터 세상과 관계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문맥 안에서 세상에 대한 부정은 단지 그것의 한계와 결핍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정은 세상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오히려 긍정이다. 사도 바울로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육'에서 '영'에로의 인간 조건의 변형, 결핍되고 한계 지워진 조건으로부터 부활한 몸의 통합되고 제한 없는 생명에로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동시에 이 세상의 변형에 참여해야 한다. 미래의 새 세상은 바로 변형된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변형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가지 삶의 방식으로 이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종말론적 삶의 방식으로 이는 인간 조건을 뛰어 넘음으로서 세상의 변형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삶의 방식이다. 이는 수도승의 삶을 말한다. 두 번째는 육화적 삶의 방식으로 이는 인간 조건 안에서 세상의 변형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삶의 방식이다. 이는 기혼자의 삶이다. 수도승은 분명 결혼한 사람보다는 세상에 덜 참여하지만, 또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참여한다. 기혼자는 육화적 전망 안에서 그리고 수도승은 종말론적 전망 안에서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모두 공통된 하나의 중심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에 참여한다. 그러면 수도승의 삶 안에서 종말론적 전망이란 무엇인가? 현재의 인간 조건을 뛰어 넘음으로서 세상의 변형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이 수도승적 표징이란 무엇인가? 이는 새로운 세상을 나타내는 표징인 미래의 공동체(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된 인격들간의 통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수도승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으로써 세상 안에 더욱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세상을 떠나 먼저 고독과 하느님 안에 굳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 다음 세상으로 내려가야 한다. 세상과 전혀 무관한 수도생활은 무의미하다. 어찌 보면 우리는 비록 세상을 떠나 왔지만 이는 다시 세상에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소리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깨어 살 수 있다. 불교에 관음보살이 있다. 관음보살은 모든 소리를 바르게 들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관음이라는 이름은 본래 관세음(觀世音)인데, 문자그대로 해석하면 '세상의 소리를 듣는 이'란 뜻이다. 다시 말해 가난하고 병들고 죽어 가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듣는 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부르짖음을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 두고 그것들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육화적 삶과 종말론적 삶은 자칫 행동주의(activism) 또는 천사주의(angelism)라는 극단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육화적 삶과 종말론적 삶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결국 이 모두는 사랑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의 두 측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