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HOME > 자료실 > 수도승영성  

 
작성일 : 07-09-26 20:40
쌀에 관한 단상
 글쓴이 : 허 로무알도
조회 : 6,819   추천 : 0  
쌀에 관한 단상


쌀! 그것은 한국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유럽인들의 식생활에 빵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과 같이 쌀은 한국인의 육적인 성장과 생명을 관장하는 주된 양식이라 하겠다. 하지만 한 톨의 쌀이 생산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거기에 얼마만한 땀과 정성이 요구되는지 알 수 있다.

쌀의 생산과정은 크게 준비기, 파종기, 성장기 그리고 수확기 네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일년 중 벼농사에서 가장 바쁘고 중요한 두 시기는 5월경의 모내기 때(파종기)와 10월의 추수 때(수확기)이다. 실제 본격적인 논농사는 대개 이 5개월 동안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추수 후부터 모내기 전까지 7개월 간의 기간 (준비기) 역시 논농사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이때 쌀을 생산하느라 지친 땅을 쉬게 하고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 거름 투여와 객토를 통해 재충전을 시키기 때문이다. 마치 출산 후의 산모에게 산후조리가 필요하고, 영적인 재충전을 위해 주기적인 피정이 필요한 것과도 같다. 소위 안식월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어린 아기(모)가 자라 어른 (쌀)이 되는 기간(성장기)은 모내기 후부터 추수 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특별히 농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정성이 요구된다. 즉 논의 물을 잘 조절해 주고 온갖 잡초들로부터 자양분을 빼앗기지 않도록 그것들을 손수 뽑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무르익은 쌀은 10월 추수 때 거두어져 우리의 식탁으로 올라온다.

벼가 자라 쌀이 되는 이러한 과정은 우리 영성생활을 위한 어떤 묵상거리들을 제공해 준다. 먼저 벼는 무엇보다도 농부의 땀과 정성을 먹고 자란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듯이 세심한 관심과 보살핌이 요구된다. 이런 의미에서 쌀은 농부의 정성과 땀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란 벼는 농부에게 수확의 기쁨을 안겨주고 그에게 자신을 송두리째 양식으로 내어준다. 농부와 벼의 이러한 관계는 우리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본질을 잘 가르쳐 준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받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신비가 아닌가!

한편 벼농사는 농부의 정성과 땀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적절한 날씨와 기온 등 자연적 조건이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 농부가 아무리 정성과 땀을 쏟는다 해도 좋은 날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참된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농부의 노력과 좋은 날씨는 풍작을 위한 필수 조건들이다. 이는 영성생활에서 인간의 노력과 하느님 은총의 관계를 잘 반영해 준다. 영적인 진보를 위한 모든 인간적 노력들은 하느님의 도움 안에서만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고, 또 하느님의 은총 역시 우리의 공동협력 없이는 우리 안에서 발화되지 못한다는 신학적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성생활과 관련해 실제적인 몇 가지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첫째, 참된 영적인 성숙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 희생과 헌신에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인간적 노력들은 하느님의 도우심 안에서 비로소 참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겸손된 자세와 맺은 결실에 대한 감사의 자세에로 나아가게 한다.

끝으로, 논농사는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농부의 땀과 정성의 결실인 쌀은 우리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줌으로써 보답한다. 이처럼 영적성장, 영적 양식을 위한 우리의 고된 노력들, 즉 부단한 자기와의 싸움이나 금욕적인 수행들은 우리에게 참된 내적 평화와 기쁨을 가져 다 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내적 성장을 가능케 하는 영적 열매, 영적인 쌀이리라!


허 로무알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