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

2010년 10월 16일-다

루카 18,1-8

언제나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느 고을에 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고을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재판관에게 가서 ‘적대자에게서 내 권리를 찾아 주십시오.”하고 졸랐습니다. 그런데 재판관은 한동안 들으려 하지 않다가 결국 속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괴롭히니 권리를 찾아주어야지. 안 그러면 끝까지 성가시게 굴겠구나.’”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들으시오. 당신께 뽑힌 이들이 밤낮 부르짖는데 하느님이 그 권리를 찾아주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망설이실 것 같습니까? 나는 말하거니와, 서둘러 권리를 찾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땅위에서 과연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도입말

맑은 하늘이 영롱한 기분 좋은 가을날입니다. 어디로 단풍구경이나 갔으면 좋음 직한 날씨들이 이어집니다. 한편 신앙인들에게는 차분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기에 좋은 계절이 가을입니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시기를 맞아 우리의 삶이 그동안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은 양 세라피노 수사님과 김 이냐시오 수사님이 수도생활에 정진하여 하느님께 항구히 머물러 많은 은총을 받고 살아가시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봉헌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강론

꽃피는 소식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고, 단풍지는 소식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옵니다. 설악산과 오대산에 단풍이 한창이라는 데 금방이라도 내려올 기세입니다. 하얗고 노랗게 물들었던 강산이 초록으로 변했다가 이제 붉게 물들었고 조금 있으면 화려한 옷을 벗고 겨울 날 채비를 서두를 것입니다. 남쪽 바닷가에서 시작되는 꽃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고, 북녘에서 내려오는 단풍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소슬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여름 내내 뜨겁게 달아올랐던 우리 육신과 정신도 냉정을 되찾은 듯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밤이 이슥하도록 책도 보고 싶고, 멀리 사는 벗들의 안부도 궁금해져 편지도 쓰게 됩니다. 또 어느 시인은 낙엽들이 지는 이때에 기도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가을은 종말을 향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묵상거리를 던져줍니다. 가을을 맞은 자연은 바쁩니다. 겨울이 닥치기 전에 창생들은 한 해 동안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동안 맺은 결실을 나누고 혹은 버립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나누고 버린 뒤에 창생들은 알몸으로 춥고 매서운 겨울을 버티고 봄에 다시 생명을 틔워냅니다. 이렇게 자연은 우리에게 어떻게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종말을 끝이라고 이해합니다.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마지막 심판, 그래서 너무나 떨리고 두려운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말은 꼭 와야 하고, 심판은 꼭 있어야 합니다. 만일 불의한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없고, 모순된 상황이 끝없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권을 행사하는 그 나라가 오면 불의한 세력과 모순된 상황은 햇빛에 눈이 녹듯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종말은 절망이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입니다. 마지막 날에 올 심판은 불의한 자들에게는 재앙이나 처벌이 되겠지만, 그분께서 뽑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바로 앞부분, 루카복음 17장 22절에서 37절에는 마지막 심판의 날, 곧 인자의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하여 나옵니다. 이 날이 오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뒤바뀝니다. 마치 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세상이 뒤집어 집니다. 기존의 세속적인 가치관과 정신들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때 일어날 일들은 인간의 눈에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 날을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실천했던 사람들에게는 숱한 핍박과 박해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과연 끝까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의로움을 지켜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인자가 올 때 땅위에서 과연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이어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우리는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항구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느님의 때가 온다는 확신을 버리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과연 정의가 승리할까 의혹이 들 수도 있습니다. 댁들이 그렇게 산들 세상이 바뀌나 하고 사람들의 냉소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날이 언제 오려나 초조해 조바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근심과 불안을 알아챈 듯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간청을 들어주는 재판관의 비유를 들어 언제나 끈질 지게 기도하며 심판의 날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매정한 재판관마저도 끈질 지게 간청하는 과부에게 권리를 찾아주는데 정의롭고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오죽하겠습니까? 하느님은 당신께 뽑힌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분은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재판관의 비유는 다른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는 이와 비슷한 비유가 또 나옵니다. 루카 복음 11장 5절에서 8절에 나오는 길을 가다 들른 벗을 위해 빵을 꾸러 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역시 줄기찬 간청은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는 뜻으로 파악됩니다. 그렇지만 비유를 읽다보면 예수님이 겉으로는 기도는 끈질기고 간절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속으로는 우리의 기도가 꼭 성취되리라는 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밖에 기도에 대한 비유가 또 있습니다. 오늘 복음 다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 역시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내용이며 기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연달아 이어진 두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사회에서 약자를 대표하는 과부와 멸시와 모멸의 대상인 세리입니다. 법정 말고는 도움 받을 곳이 전혀 없기에 과부의 간청은 끈질기고 간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음을 통감하기에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기도의 자세일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개인과 가정의 행복과 안녕 그리고 행운을 비는 일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위하고, 세상을 살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숨 바쳐 이루고자 했던 새 세상이 오기를 끈질기게 청해야 합니다. 불의와 모순이 심판을 받고 사라지며,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주인이 우리들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대면하며 우리 자신을 낮추고 비워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하여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겪는 온갖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나갈 힘을 얻어야 합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실패에서도 일어나고, 아무리 하찮은 일에서도 그분의 섭리를 발견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마지막 심판의 날을 기다립시다. 하느님의 자비가 이 땅에 내리어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고 평화롭게 살아갈 그날이 오기를 굳게 믿으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시다. 이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최고의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