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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27 14:55
덕원의 순교자 29 : 쿠니베르트 (블라시우스) 오트(Kunibert Ott) 신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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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시우스(쿠니베르트 신부) 오트는 1912712일 아욱스부르그 교구에 속한 크룸바크 근교의 에델쉬테텐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미하엘 오트와 어머니 요세파 피셔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트의 누이인 루이트라우트 수녀는 우르스베르그의 성 요셉 수도원에 입회하였는데, 수녀로서만이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유명하였다.

1923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소신학교에 입학한 블라시우스 오트는 1933년 도나우 강변의 딜링엔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3512일 쿠니베르트(쿠니베르투스 Cunibert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쿠니베르트 신부는 1934514일 첫 서원을, 1937517일 종신서원을 하고 상트 오틸리엔 대학과 뮌헨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1937829, 종신서원을 한 즉시, 한국의 덕원 수도원으로 파견되었는데, 덕원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쿠니베르크 신부는 덕원 수도원이 폐쇄될 때, 처음에는 평양 감옥에, 그 다음에는 옥사덕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수용소의 학대로 1952614일 운명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쿠니베르트 오트 신부는 신부들 중에 가장 젊은 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시 군복무에 편입될 위험 때문에 몇몇 동료와 함께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한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폐가 약간 약했는데도 처음에는 수용소에서 건강을 잘 유지했다. 우리 모두는 그를 쾌활하고 항상 웃는 마차꾼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포의 고난이 그를 지치게 만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는 항상 병약한 사람들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때때로 심하게 부어올랐고 심한 심장 협착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그는 영웅적으로 적을 사랑했고, 화해를 이루려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는 엘리기우스 신부가 1951년에 그의 자리를 내놓은 이후에 그를 총책임자로 선출했다. 사람들은 또 이 직책을 통해 그를 더 쉽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쿠니베르트 신부를 자기 나름대로 존중했던 소장조차도 이러한 희망을 표명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쿠니베르트 신부를 자기의 건강에 유의하도록 설득할 수 없었으며(얼마나 자주 그는 숨을 헐떡이며 들일꾼들에게 산으로 무거운 음식을 가져다주었던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기꺼운 각오와 온순함으로 인해 경찰에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불행에도 불구하는 그는 항상 평온하고 즐거워했으며, 그의 밝고 순진한 웃음이 종종 수용소 전역에 울려 퍼졌다. 그가 가고 나서 우리는 얼마나 쓸쓸해졌던가! 나는 그의 병을 심한 심장-각기라고 생각했다. 심한 발작을 두 번 한 이후에 그는 병자 도유성사를 받았는데, 그것이 죽기 약 일주일 전이었다. 한 시간 후에 그는 수용소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봐요, 이제 다시 좋아지고 있어요.” 하지만 그로 인해 건강은 더 나빠졌다. 613일 금요일에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화장실에 갔으며, 두 시간 후에 피를 토했고, 격렬한 상복부의 고통으로 쓰러졌다. 내가 갔을 때 그는 말했다. “이번에는 이루어질 거예요.” 그의 말은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고 위험은 다시 지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옳았다. 온종일 그는 고통을 당했으며, 밤에는 동료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자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시에 나를 부르게 했고, 614일 아침 5시 반,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고통을 끝냈다. 그의 죽음은 우리 공동체에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