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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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4 15:47
[세상에 빛을⑩] 덕원 수도원④ 원산대목구와 성 베네딕도회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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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소 방문을 마친 뒤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선교사에게 작별인사로

큰 절을 올리는 어린이의 모습이 무척 귀엽고 재미있다.

이를 지켜보는 엄마나 어르신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의도적으로 연출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사진에 넘쳐난다.

촬영연대는 알 수 없다.

 

 

▲ 함경남도 남단 고원군에 있던 고원본당은

1936년 6월 3일 본당 부설 야학교를 개편, 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사진은 당시 고원본당 주임 볼프람(두 번째 줄 가운데) 피셔 신부가

학생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이다.

음악에 특히 조예가 깊던 피셔 신부는 본당에서 신학교를 왕래하며

신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신학교 관현악단을 감독했다.

1938년 7월 20일 「가톨릭 성가집」을 편찬하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 8월 1일 갑작스럽게 선종했다.

 

 

 ▲ 1931년 부활대축일 당시 덕원수도원 임시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와 주임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수도원 부원장도 겸했던 다베르나스 신부는 1944년 선종 때까지 덕원본당 주임을 맡아 사목했다.

 

 

▲ 함경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북청군은 동ㆍ북ㆍ서 3면이

장령과 대덕산, 후치령 등으로 둘러쌓인 충적 평야다.


주민 수가 22만 여 명에 이르는 북청군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35년 초로,

갈리스도 히머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해 성당 공사를 시작했고,

후임 비트마르 파렌코프 신부가 완공했다.


새 성당과 사제관은 1935년 12월 15일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 주례로 봉헌됐으며,

본당 주보는 성녀 오틸리아였다.


그래서 제대에는 1934년 다고베르트 엘크 신부가

덕원으로 파견될 때 갖고 온 오틸리아 성녀의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와 덕원수도원 루치오 로트 원장신부는

1935년 8월 8일 함경남도 중부 흥남시에 본당 터를 매입해 두 달 뒤 성당 신축에 들어간다.


사진은 1936년 4월 성당 신축이 완료되기 직전 흥남성당 전경으로,

성당 신축은 힐라리오 호이스 수사와 야누아리오 슈뢰터 수사가 맡았다.


완공 직후 초대 주임으로 갈리스도 히머 신부가 활동했다.

 

 

   "그러나 아직도 해야 할 일은 태산과도 같습니다.

수도원과 수녀원, 신학교, 해성보통학교 건물은 완공했지만

덕원 수도원 성당과 원산주교좌성당, 나남과 청진 등지에도 성당을 지어야 하고

해성보통학교 여자부 교실도 신축해야 할 터인데 자금이 궁핍합니다.

교구 내 신자들만이 아니라 전 한국 교우들이 기구와 희생으로 도와주시길 간청하는 바입니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늘 부족한 재정으로 노심초사했다.


 1929년 「경향잡지」(통권 제23권)에 토로한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서한을 보면,

수도회 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금세 알 수 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독일 패전으로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 재정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1920년대 말에 불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해외 원조가 줄어든데서 기인한다.

성당 하나를 짓고나면 수도회 당가(재정 담당) 신부가 할 일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교구 신자들 또한 생활이 어려워 수도원에서 오히려 이들을 보살펴야 했다.


 이런데도 전교 실적은 상당한 결실을 얻었다.

1920년 8월 5일 원산대목구 설정 당시 함경도 원산ㆍ내평 본당과

간도 심원봉ㆍ용정ㆍ팔도구 본당 등 다섯 개 본당에 83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927년 8월에는 14개 본당에 1만4005명으로 늘어났다.


 함경도에서 회령(1925년)ㆍ청진(1926년)ㆍ함흥ㆍ덕원(이상 1927년) 본당이 설립됐고,

간도에도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연길(1922) 분원 및 본당 설립을 시작으로

팔지(1923년)ㆍ혼춘(1924년)ㆍ대령동(1926년)ㆍ돈화(1926년)본당이 세워졌다.


 1921년 3월에는 베이만츄(北滿洲)대목구에서 이란(依蘭, 의란)선교지 관할권이 넘어오자,

베네딕도회는 1922년 푸진(富錦, 부금)시에,

1927년 자무쓰(佳木斯, 가목사)시에 본당을 설립한다.

1925년 원산대목구에만 사제가 28명으로 늘어나는데 그 이유는

오틸리엔연합회가 전쟁으로 아프리카 선교지가 붕괴되면서

원산대목구에 선교인력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원산대목구 교세가 이처럼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선교사 역할도 컸지만,

당시 한국인 회장들의 '보이지 않는' 역할도 지대했다.

특히 유급 전교회장(1928년 8월 당시 22명)들은 공소회장(1928년 170명)과 함께

선교사와 신자들 간 중개 역할을 하며 예비신자를 모으고

교리를 가르치며 교회 안팎 행정사무를 도맡았다.


 또 1925년 11월 한국에 파견된 독일 툿찡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도자들의 역할도 컸다.

이들은 여성과 아동, 어르신들 교리 강좌와 함께

빈민을 위한 시약소, 농아학교 등을 운영했고,

고산ㆍ회령ㆍ함흥ㆍ청진ㆍ흥남 본당 등에 분원을 설립해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발전하던 원산대목구는

1928년 7월 3일 헤이룽장성 이란 선교지가 이란지목구로 독립하고,

16일 뒤인 7월 19일에는 연길지목구가 분리 설정돼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란ㆍ연길지목구 분리 이후 원산대목구는

신고산(1930년)ㆍ영흥(1931년)ㆍ고원(1933년)ㆍ

북청(1935년)ㆍ흥남(1935년)ㆍ나남(1936년) 본당을 설립했고

다시 활발한 선교사업을 전개한다.


 1940년 1월 12일에는 덕원면속구(현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현 함흥교구)로 재분할한다.

덕원면속구(3625㎢)는 원산시와 인접 안변군, 문천군, 고원군 등 4개 지구를 관할하고,

함흥대목구(4만9375㎢)는 나머지 지역을 관할한다.


 일제는 당시 일본인에게 함흥대목구장을 맡기려 했으나

성직자 부족으로 계속 베네딕도회 관할 아래 사우어 주교아빠스가 관장했다.

이같은 상황은 해방 뒤 공산정권 수립, 한국전쟁, 분단 고착화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평화신문  2009.08.21] 
 
 

 

▲ 독일 출신 선교사들은 우리말을 배워야 했고, 한문은 따로 공부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어 강요정책이 추진되면서 일본어도 더불어 익혀야 했다.
간도나 중국 동북부 의란에서 선교하던 회원들은 중국어도 배워야 했다.
이에 연길 수도원 테오도르 브레허 주교아빠스나 덕원 수도원 세바스티안 슈넬 신부 등은

대여섯개 이상 언어를 익혀 탁월한 언어 감각을 보였지만,

대부분 선교사들에게 언어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고 한다.
이런 고충을 해결하고자 선교사들은 한문 자전인

「요한덕해」(1915년, 베드로 카니시오 퀴겔겐 신부 지음)나

「한국어문법」(1936년 루치오 로트 신부 지음) 같은 교재를 집필해 사용했다.
사진은 한 평신도에게 우리말과 한자를 배우는 선교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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