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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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4 15:47
[세상에 빛을⑨] 덕원 수도원③ ''가톨릭 문화 중심지'' 된 덕원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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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 수도원 영농활동은 수도원 자급자족뿐 아니라

이웃한 한국 농부들에 대한 영농 기술 전수를 통해 나눔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1949년에 작성된 덕원수도원 일람표에 따르면,

임야 100ha(30만3000여 평)에 밭 15ha(4만5450여 평),

논 7ha(2만1210여 평)가 수도원의 소유였고,

덕원신학교는 논 4ha(1만2120여 평)에 밭 3ha(9090여 평)를 소유했다.
그리고 근방 10개 마을에 덕원신학교 소유 소작지가 있었다.
이는 덕원수도원 및 신학교를 유지하는데 충분한 재정적 바탕이 됐다.

 

 

▲ 1928년 일제 당국 인가를 얻어

외과 및 내과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원이 덕원수도원 안에 설립됐다.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병원장의 추천으로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일단 3년간 의사실습을 할 수 있는 면허를 교부받았고,

나중에 경성제대 병원 외과의 배려로 서울에서 임상 경험을 쌓아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1929년 여름에 진찰실 2개에 대기실과 약국으로 이뤄진 작은 진료소가 완공됐고,

1933년과 1934년에 진료소를 증축해 확장했으나 의원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1934년 1년간 의료봉사 결실을 보면, 진료를 받은 환자 수는 2만1065명에 이르렀고,

약품을 제공받은 이는 2만7210명에 달했다.
사진은 덕원수도원에 있던 덕원의원 전경이다.

 

 

▲ 덕원수도원에서 재봉실 책임자였던 요아킴 바우어 수사가 견습생들과 함께 옷을 짓고 있다.
재봉실에서는 수도복과 주교 및 사제들 수단, 복사복, 잠옷, 바지, 외투 등

각종 복식과 커튼, 모자 등을 만들었고, 심지어는 본당에서 쓰이는 깃발도 제작했다.


 

▲ 덕원수도원 인쇄소에서 강 세바스티아노 수사와 루도비코 피셔 수사가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1929년 중소 간 국경분쟁이 벌어지면서 만주 동북부 의란포교지에서

본당 건축을 하던 일데폰스 플뢰칭거 수사가 덕원으로 돌아와

1929년 성탄대축일을 앞두고 수공으로 교회 광고지를 인쇄한 것이 덕원 인쇄소의 시초다.

이어 인쇄기가 들어왔고 피셔 수사가 식자에서 인쇄, 제본까지 맡아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덕원 인쇄소는 1938년 한 해 동안 「천주교 교리문답」(1만5000부), 「노인용 문답」(1500부),

「십이단(열두 가지 주요 기도문을 모은 책)」(2000부), 「미사경본」(400부),

「아해(어린이)들의 미사ㆍ고해ㆍ성체 안내」(2000부) 등을 간행했다.

1939년 연길 수도원에 인쇄소가 세워지기 전까지

원산대목구와 연길지목구의 모든 서적이 이곳에서 간행돼 베네딕도회의 자랑거리가 됐다.


 

   한적한 시골이던 덕원은 수도원 건설로 '가톨릭 문화의 핵'으로 떠오른다.

'수도생활'을 주축으로 교육과 출판ㆍ인쇄 사업, 의료 봉사, 농공 활동 등을 통해서였다.


 교회 전례 기도나 시간전례(성무일도) 또한 선교로 보는 베네딕도회는

기도를 통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내적 여정으로서 수도생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삶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 여정에서 관상생활(vita contem-plativa, 기도ㆍ묵상ㆍ렉시오 디비나)과

수행생활(vita pratica, 금욕과 같은 내적 투쟁)이 이뤄졌다.

교육과 출판ㆍ인쇄, 의료, 농공 활동에는 이미 이같은 수도생활이 녹아들어갔다.

 

수도생활 주축으로 교육ㆍ출판ㆍ의료ㆍ농공활동 총 망라

   출판, 인쇄 문화 꽃피워


 1927년 12월 덕원신학교를 개교한 덕원수도원은

사제 및 수도 성소 발굴과 함께 교육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덕원신학교는 일제강점기 중 국내에서 가장 많은 박사학위 소지자 교수진을 보유,

높은 교육의 질을 확보했다. 또 신학교 교지 「신우(神友)」 총 7집 발간(1933~1939년),

신학교 성가대와 관현악단을 통한 어학ㆍ음악ㆍ노래ㆍ연극ㆍ재담 공연도 이뤄졌다.

단막 '목동 다윗'(1928년)과 '요셉과 형제들'ㆍ'조선 농부들의 라디오'(1931년),

'한 불교 대학생의 개종'(1932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그의 생애와 죽음'(1935년) 공연 등이 특기할 만하다.


 일반인 교육의 경우 원산대목구 설립 때 4개 학교에 학생 수는 220명에 불과했지만,

1921년 5월 원산 해성학교 개교를 시작으로 각 본당별로

해성학교 설립이 잇따라 1923년에는 36개 학교에 2080명이 재학했다.

덕원면속구(현 덕원자치수도원구) 설립 이전인 1940년 원산대목구 마지막 교세 통계에 따르면,

인가 학교 12개교에 남녀 학생 5159명(이 중 신자 913명)이,

미인가학교 15개교에 1425명(신자 723명)이 각각 재학했다.


 1910년 2월 「성분도언행록(성 베네딕토 전기)」 간행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출판ㆍ인쇄 또한 문화의 꽃을 피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1930년대 초 출판에 들어간 덕원수도원은 처음엔 발판이 달린 일제 인쇄기를 쓰다가

나중에는 수동 롤러식 인쇄기 2대를 도입했고, 수동식 종이 제단기 1대와

수동식 활자 주조기 1대도 함께 썼다.


 루드비히 피셔 수사를 책임자로 원산대목구와 연길지목구에서 필요한

전 서적을 간행함으로써 베네딕도회의 자랑거리가 됐다.

등사판 「미사 통상문」(1932년), 한글판 「미사 규식」(1933년),

「미사 경문」(1933년) 발간이 대표적이며, 「주일 미사 경본」 및 「성인 미사 경본」(1934년),

「아해(어린이) 미사」(1936년) 발간도 잇따랐다.


 아울러 성사 안내서와 성무일도, 기도서, 교리서, 신심서, 교리교재도 간행했다.

1933년 6월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는 선교활동과 함께

한글 애용ㆍ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창간 3년 만에 폐간된다.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오면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 중 하나는 의료봉사활동이다.

1928년 5월 일제 당국의 인가를 얻어 개원한 의원은

요셉 그라하머 수사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를 주축으로

1년 만에 1만8800여 명을 치료하는 성과를 거둔다.


 수도원은 물론 신학교와 본당 등에 천연두와 콜레라, 장티푸스 등이 만연하면서

이들 수사들의 일은 더 바빠진다. 1930년대 초에 하루 평균 50~60명의 환자들을 치료하던

그라하머 수사는 일에 지쳐 1931년 독일로 요양차 떠나야 했다.

그러나 1년 만에 돌아오면서 의료봉사는 다시 활기를 띠었고,

1933년과 이듬해 증축을 통해 덕원의원은

진찰실과 전기 방사선실, 수술실, 병실, 입원실 등을 갖춘다.

 


   영농 및 목축 기술 전수


 농공 활동 또한 눈부시다. 서울 수도원에서 기초를 닦은 목공장과 철공장, 농장은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와서도 그대로 유지됐고, 제분소도 들어섰다.

육림과 원예, 양봉 사업과 함께 자물쇠 공장, 칠공장도 새로 운영한다.

수도원과 신학교 건립을 통해 덕원수도원은 건축 분야에서 외형적으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밀 재배와 포도와 옥수수, 감자 재배도 주목할 만하다.

또 플라치도 노이기르그 신부를 주축으로 육림에도 힘써

1933년 수도원 둘레에 가로수와 관상용 나무 5000그루를 심었고,

수도원 뒤편에도 소나무와 낙엽송, 회양목 등 3만 그루를 조림했다.


 베네딕도회가 일군 농업과 목축은 수도원 및 교구 본당에

필요한 양식과 재원으로만 활용된 게 아니라, 영농 및 목축 기술 전수를 통해

한국 농부들과 나눴다는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평화신문  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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