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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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4 15:43
[세상에 빛을⑦] 덕원 수도원① 덕원 수도원 건립 및 초창기 원산대목구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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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에 지어진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뒤쪽)과 이듬해 완공된 덕원 신학교 전경.
1931년에서 1936년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수도원과 신학교 건립을 통해 덕원 수도원은 원산 선교지에서 수도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 터전이 됐고,

1940년 함흥대목구(현 함흥교구)와 덕원면속구(현 덕원자치수도원구)가 분리 설정될 때까지

원산교구 내에서 본당 사목활동과 신학교 운영 등을 담당했다.

 

 

▲ 1927년에 지어진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뒤쪽)과 이듬해 완공된 덕원 신학교 전경.
1931년에서 1936년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수도원과 신학교 건립을 통해

덕원 수도원은 원산 선교지에서 수도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 터전이 됐고,

1940년 함흥대목구(현 함흥교구)와 덕원면속구(현 덕원자치수도원구)가 분리 설정될 때까지

원산교구 내에서 본당 사목활동과 신학교 운영 등을 담당했다.

 


 

▲ 덕원 수도원 성당 주일미사 강론 장면.
촬영연대는 알 수 없다.


 


▲ 성 베네딕도회 원산 분원 및 원산본당 자리에 들어선 원산대목구 주교관이다.
1925년에 짓기 시작해 이듬해 중반에 공사를 마쳤다.
원산본당은 원산대목구 주교좌이므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주교좌 성당이 필요했지만,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먼저 주교관을 지었다.
당시 주교관에는 원산본당 주임신부와 보좌신부들뿐 아니라

몇몇 수사들도 함께 거처하면서 수도생활과 선교활동을 병행했다.
사진 촬영 연대는 192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 1924년 9월 12일 서울 성 베네딕도수도원을 방문한 주일

교황사절 마리오 자르디니(1877~1947, 왼쪽에서 두 번째) 대주교가

닷새 뒤 원산대목구장 사우어(왼쪽에서 세 번째) 주교아빠스를 대동하고 원산본당을 방문,

신자들이 뒤쪽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27년 11월 16일 성녀 제르트루다 축일,

함경남도 덕원군 부내면 어운리. 원산 시내에서 북쪽으로 4㎞ 떨어진 시골 마을에

중세 로마네스크 풍 수도원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천주교회 세 번째 가지로 원산대목구가 설정된 지 7년 만이었다.


 덕원수도원은 마치 중세 유명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인

독일 히르사우(Hirsau) 수도원을 다시 보는 듯했다.

 

세 건물은 U자형을 이루도록 설계됐고, 가운데에는 장차 성당이 건립될 예정이었다.

같은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인 수도원 성당은

1929년 7월 공사에 들어가 1931년 12월 24일 축성됐다.


 남서쪽으로 정면을 둔 본관은 4층으로, 좌우 건축물은 각각 4층과 3층으로 세워졌다.

수도원에서 200m 가량 떨어진 밭에 신축한 신학교 건물은

수도원 공사와 동시에 시작해 1928년에 완공했다.


 수도원과 신학교 건립에는 150만 개에 이르는 벽돌이 소요됐으며,

이 벽돌은 원산 근처 형무소에서 제작돼 조달됐다.

수도원 북쪽 200m 지점에는 부원장 레오폴드 다베르나스 신부가 설비한

풍력발전소를 둬 수도원에 전기를 공급했다.


 수려한 자연 경관에다 440헥타르(133만994평)에 이르는 넓은 부지를 확보해 세워진 덕원수도원은

이날 축복식을 겸해 열린 입주식을 거쳐 지역 사회는 물론 한국천주교회 명소로 떠올랐다.


 이에 앞서 서울 수도원은 덕원수도원 건물 1층이 완공되자 수도원 이전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덕원으로 옮긴 수도원 짐은 철도차량 16대 분량으로,

도서관 책만 해도 50개 상자를 가득 채웠다.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은

한결같이 성 베네딕도회가 서울에서 이룬 업적을 높이 평가하며

서울을 떠나게 된데 애석해 했다.


 서울 철수와 함께 서울 수도원 전역은 경성대목구(현 서울대교구)로 넘어갔고,

수도원 내 가장 큰 작업장은 성당으로 개조돼 1927년 10월 7일자로

서울 세 번째 본당인 백동(현 혜화동) 본당이 탄생한다.


 '덕의 원천(德源)'이라는 뜻을 지닌 지명을 살린 덕원수도원은 그 규모로나,

자급자족적 생활로나, 신학교로 보나 모범적 공동체였다.

특히 선교사들에겐 형제적 공동체 정신과 수도원만의 고요함을 누릴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됐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가 그토록 열망하던 수도원 이렇게 건립됐다.


 덕원수도원은 당시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연합회가 선교지에 건설해야 할

'수도원과 선교지의 참된 베네딕도회적 결합 모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덕원수도원 시대가 열리면서 원산대목구 교세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21년 베네딕도회가 경성대목구에서 인수받은 본당은

함경도 원산ㆍ내평 본당과 간도 삼원봉ㆍ용정ㆍ팔도구 본당 등

5개 본당에 신자 83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27년에 이르면

함경도에 회령(1925년)ㆍ청진(1926년)ㆍ함흥 및 덕원(1927년) 본당이 설립됐고,

간도와 남만주에도 성 베네딕도회 연길분원 겸 본당(1922년)ㆍ팔지(1923년)

ㆍ혼춘(1924년)ㆍ대령동(1926년)ㆍ돈화(1926년) 본당이 신설됐다.


 서울 수도원 마지막 연대기 보고에 따르면,

1927년 8월 현재 원산대목구 교세는 총인구 320만 명에

신자 총수 1만4005명(복음화율 0.44%), 예비신자 수 1092명, 본당 14곳, 공소 176곳,

주교 1명, 신부 27명, 수사 25명(한국인 수사 7명 포함), 수녀 25명, 전교회장 22명,

공소회장 170명으로 집계됐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평화신문  200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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