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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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4 15:43
[세상에 빛을⑥] 서울 수도원⑤ 서울 수도원 이전 및 원산대목구 분리 설정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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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력 발전은 요즘 전 세계적으로 '신재생에너지의 꽃'으로 불리며

친환경 전력 생산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 수도원은 이미 100여 년 전 수도원 내에 풍력 모터를 설치, 전력을 공급했다.
철공장 장인인 게르마노 하르트만 수사에 의해서였다.
1906년 1월 21일 가동된 풍력 모터는 서울 수도원에 전기를 공급했고,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된 뒤에도 모터를 옮겨 가동했다.
이 모터는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 돼 장안의 화제가 됐다.

 

 

 

▲ 서울 수도원에서 미사주를 제조한 것은 1917년 이후다.
수도원 구내에는 일찍부터 포도밭이 일궈졌는데, 1925년 초 정원지기였던

에우제니오 오스터마이어 수사가 새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또 이듬해인 1926년에는 포도 농사가 풍작을 거둬 포도만 9060㎏을 수확했다.
이 포도밭에서 재배한 품종은 리즐링과 사향포도 등 주로 독일ㆍ프랑스계 품종이었다.
서울 수도원에서 제작된 미사주는 후일 수도원 소속 선교사들이 파견된 원산대목구 각 본당에 공급됐다.

사진은 포도 농사를 짓고 있는 수사들 모습이다.


 

▲ 서울 수도원 한국인 청원자들이 1922년께 당시

안성본당 주임 공베르(앞쪽,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지도로 피정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 중 황 보니파시오(뒷줄 오른쪽)ㆍ김재환(플라치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수련수사는

1923년 6월 9일 첫 서원을 함으로써 첫 한국인 베네딕도회 수사가 됐고,

오 노르베르트(뒷줄 왼쪽) 수련수사는 같은 해 8월 15일에 첫 서원을 했다.

성과 세례 이름만 남아 있는 수사들은 현재 이름이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같은 해 첫 서원을 한 세 수사는 첫 한국인 청원자들이었다고

1923년판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편람」은 전하고 있다.

 



▲ 필리핀 주재 교황대사 요셉 페트렐리(1873~1962, 앞줄 가운데) 대주교가

1917년 6월 3일 서울 수도원을 방문, 수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페트렐리 대주교는 일제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특사로 일본에 파견돼 도쿄에서 업무를 처리한 뒤

그해 5월 28일부터 7일간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해 한국천주교회를 둘러봤다.


 

▲ 초대 일본 주재 교황사절 피에트로 푸마소니 비온디(1872~1960) 대주교가

1920년 11월 10일 서울 수도원을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쪽에 차량이 도착해 있고 수도원 현관 입구에 비온디 대주교와 수사들, 한국인들이 늘어서 있다.
그해 10월 29일 한국을 찾은 비온디 대주교는 21일간 한국에 체류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약에' 성 베네딕도회가 원산 포교지로 떠나지 않고

서울에 남았더라면 한국천주교회와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를 위해서는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펼친 활동을 가늠해보면 된다.

숭공(崇工)ㆍ숭신(崇信)학교를 통한 교육은 당시 베네딕도회의 대표적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식 기술자ㆍ교사 양성시스템을 이식한 이들 학교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근대 실업ㆍ사범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숭공학교는 개교 11년 만인 1921년에, 숭신학교는 개교 2년 만인 1913년에 각각 문을 닫았다.

우리로서는 독일 선진기술 전수나 학문 습득을 통해

근대화를 앞당길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었다.

한국인 고등교육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탄압했던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 1차 세계대전 중 적대국이던 프랑스와 독일에서

각각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와 베네딕도회 간 미묘한 갈등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서울에서 본당 사목을 하고 싶어했던 베네딕도회의 꿈도 파리외방전교회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혹자는 "9만9173.6㎡(3만 평) 부지를 확보한 숭공기술학교가 서울에 존속했다면,

최고 명문 사립대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석우(한국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몬시뇰은

'한국 분도회 초기 수도생활과 교육사업'이라는 논문에서

"수도원이 덕원으로 이전된 후에도 베네딕도회는 서울에서 숭공학교를 계속하려 했으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동의하지 않아 폐교하고 말았다"며 "

서울에서 베네딕도회 활동 중단은 한국천주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위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성 베네딕도회는 이같은 현실적 어려움에 직면,

1920년 8월 5일 '원산대목구' 분리 설정으로 선교의 돌파구를 찾는다.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본래 평안도를 베네딕도회에 포교지로 제안했으나,

평양 일대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개신교 선교사들이 대거 진출해

우세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당시 발전가능성이 높던 원산을 선택했다.

교황청도 뮈텔 주교와 베네딕도회 간 협의를 받아들여

1920년 8월 5일 함경남북도를 원산대목구로 설정해 베네딕도회에 위임했다.


 사우어 아빠스는 그해 8월 25일 원산대목구장에 임명됐고,

이어 이듬해 5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주교아빠스로 성성된다.

또 1921년 3월 19일에는 만주 간도(연길)선교지와

북만주 동부 의란(依蘭)선교지까지 원산대목구에 편입한다.

이로써 원산대목구는 전체 선교지가 총길이 1100㎞,

총면적 20만5000㎢에 이르는 광할한 지역을 관할하게 된다.


 베네딕도회는 이에 수도원을 원산 시내에서 4㎞ 떨어진

덕원(함남 덕원군 부내면 어운리)으로 옮긴다.

그 기간이 7년이나 걸렸다.

  덕원 수도원 건립은 1922년 에카르트 신부에 의해 시작돼

1924년 원산본당에 부임한 슈미트 신부가 책임을 맡아 수행했다.

건축기사인 피어하우스 신부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중세 독일 수도원을 본따 설계했다.

1926년 7월 착공, 게르네스트 신부가 공사총감독을 맡아 신축했으며,

이듬해 11월 16일 성 제르투르드 축일에 수도원을 봉헌함으로써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시대'를 연다.

 

 


사진 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평화신문  2009.07.11]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09-09-04 15:57:56 아름다운글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