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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10 09:22
그림과 함께 보는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989   추천 : 0  

 사부 성 베네딕도

  Sr. M. Regina Goberna

 

 

 이번 호부터 몇 차례에 걸쳐 번역 연재될 '사부 성 베네딕도'는 성 베네딕도의 탄생 1500주년 기념 해였던 1980년, 스페인에 있는 성 Benet de Montserrat 관상 분도회의 Sr. M. Regina Goberna, 0.S. B. 가 베네딕도 성 인의 생애를 우리 시대의 말과 그림으로 엮은 재미난 책이다. 선뜻 보기에 그림과 말들이 아주 평이하여 마치 만화나 어린이들이 보는 책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자꾸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깊은 뜻을 새롭게 헤아릴수 있게 되는 매력을 지닌 책이기도 하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정신을 보다 잘 이해하고 사랑하며 실천하는데 도움을 얻고 또한 기쁨이 있기를 축원한다.

역자

 

 

 사랑과 창조

 

 

 

 

 그는 베네딕도, 그 이름 그대로 축복받은 자, 은총받은 자였다. 그는 누르시아에서,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때는 480년 경 이었다.

 

오이트로피오와 아분다치아는 결혼한 이래 줄곧 함께 '거룩한 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결점과 죄에서부터 자유로웠고 언제나 한 마음이었다. 사랑은 곧 그들의 풍요로운 삶의 원천이었다.

 

어느 날 그들은 느즈막한 나이에 이르러 두 쌍동이를 낳았다: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그들은 이미 대가족이었지만 그들에게 이 두 어린애의 탄생은 대단히 큰 기쁨이었다.

 

"하늘에서 언제나 우리를 굽어보시는 자비하신 아버지, 당신 손에 이두 작은 피조물을 맡깁니다. 오늘 시작하신 새로운 이 창조업적을 앞으로 친히 완성해 주십시요"하고 어머니 아분단치아는 애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오이트로피오도 감격하여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이시여, 세상 태초부터 오늘까지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우리는 당신을 찬미하고 찬송하나이다. "

 

 

 희망

 

 

 

매년 봄이 오면 두 어린 형제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는 꽃이 만발한 들판과 푸른 초원을 뛰어 다녔다. 여리디 여린 꽃봉오리가 단단한 껍질을 뚫고서 새 꽃잎을 피우려하고 온 자연이 기쁨에 떠는 것처럼 이 두 어린애 역시 새 삶에로 향한 희망의 외 침 이었다.

 

지극히 크신 하느님께 향한

아주 작은 어린이의 희망.

살아 있는 희망. 젊다. 무겁지 않다.

열렸다. 창조적이다. 새롭다.

실망이나 좌절과는 정반대의 것,

그 어느 것으로도 극복될 수 없고

모든 체험으로 인해 더욱 강해지는,

결코 의혹을 갖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희망.

 

"나는 언젠가 훗날에 크고 강한 사람이 되면 용감한 군인이 될꺼야. 그래서 나는 참 왕이시고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하가 되고 싶어."

 

"나는 하이얀 비둘기가 되어서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어.

 

"멀리서 두 어린애를 바라보고 섰던 착한 유모 시릴라는 두 팔을 쳐들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 귀여운 쌍동이의 훌륭한 원의와 희망을 이루어주소서. 그리고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되게 해주십시오."

 

 

 

대학

    

그러나 부모는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나이 어린 베네딕도를 학업연마를 위해서 큰 도시 로마로 보냈다.

 

베네딕도는 철인 소크라테스에게서 인간의 존엄성을 배웠다: 한 사람한 사람 모두가 그 얼마나 훌륭한가! 귀족 출신이건 노예 출신이건 예외없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는 플라톤을 통해서 최상의 선이 모든 피조물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베네딕도는 사랑안에서 두려워해야할 분,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익히 알고 계시는 분, 그리고 매순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의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선을 행함으로써 덕행에 대한 기쁨을 찾을 수 있음도 배웠다. 슬퍼하는 성인은 참으로 슬픈 성인이다.

 

발은 땅 위에 굳굳이.

마음은 하늘에.

이 양극을 서로 이어주기 위해

선행으로 가득 채워진 생에 기쁨을 가진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위하여 아직은 어렸지만 참으로 훌륭한

베네딕도로서 다듬어져 가고 있었다.

 

 

 

 

피난

 

 

 

  아니다. 아니다. 결코 아니다.

둘째 자리에 학업, 그리고 사회에서의 직위. 첫째 자리에 삶. 이런 순위는 모든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돌이킬 수 없다.

사람들에게 바른 길로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멸망에로 인도되는길이 있다.공부하면서 연이어 술 좌석에 함께 자리하는 사람은 서서히 힘이 빠지고 마침내는 균형을 잃게 되고 만다.

이성은 비록 부해질지언정 그의 육체는 노예가 되고 만다.

 

베네딕도는 단호하게 일치의 길을 택하였다.

 

원조의 범죄 이전의 사람처럼 자기 자신 안에서 하나인 사람은 참된 가치 질서에 의해서 인도될 것이다. 그는 제일 먼저 하느님의 마음에 들려하고 영혼의 높은 힘을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계가 이루어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베네딕도 역시 세상을 정반대의 관점에서부터 보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지혜는 그에게 한낱 어리석음으로 보여졌고, 그래서 그는 마침내 도망치기로 결심을 하였다. 이같은 세상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는 세상에서부터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도망치려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세상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정상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였다.그러자 그는 빛을 보았다. 무슨 빛이었을까?

 

 

 찾는 자는 발견할 것이다.

 

 

 

 

  진지하게 찾는 사람이 가야할 그 길의 시작은 필연코 좁다. 그러기에 어려움을 만났다고 해서 즉시 두려워하거나 놀라서는 안된다.

찾는다는 것은 온 힘을 다해서 어떤 보화를, 어떤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르심을, 어떤 사명을 따른다는 것은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인내롭게 다가가는 것이다. 오직 자기자신을 떠나는 사람만이 찾을 수 있다. 오직 위로 향해 걸어가는 사람만이 실제로 위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랑의 봉사하는 삶에서 자작스런 일을 당했을 때 무관심이나 양보가 만남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바람결에도 자신을 굽히지 않는 곧은 길과 강한 의지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일까?

하느님 친히 대답하신다: "나의 아들아, 네가 진실로 나를 찾는다면 내가 너의 청을 들어주리라. 그리고 네가 나를 부르기 전에 내가 너에게'나 여기 있노라'고 말하리라."

 

어린 베네딕도는 이것을 곧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이미 산 위에서, 훌륭한 수도자 로마누스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그는 이미 나이가 많아 힘들고 고달팠을 테지만 찾는데 있어서만은 아직도 그의 힘이 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역시 이 어린 소년 안에서 그분을 알 수 있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인도되었다.

"당신께 내 비밀을 열어 보일 수 있을까요? 나는 숨어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진실로 하느님을 찾으려고 합니다"하고 베네딕도는 고백하였다.

"나의 아들아, 너를 이미 찾으신 그분을 찾아라. 믿음 안에서 찾아라.그러면 언젠가 너는 매일 매일 네 곁에 계셨던 그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네가 머물고자만 한다면 오직 네 발을 안으로 들여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수 도 복

 

 

 

 

이튿날 로마누스는 베네딕도에게 수도복을 입혀 주었다.무슨 권한으로 그가 수도복을 입혀 주었을까? 이 무슨 특권인가? 그는아무것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른 모든 형제들의 형제가 되려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질감을 주는 옷이 아니였을까?

 

 

깊은 생각 끝에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를 찾았다:

그 옷은 로마누스가 입고 있던 똑같은 옷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는새로운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 옷은 베네딕도가 새 사람이 되고자 시작한 것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둘째 번의 성세성사 안에서처럼 그는 새 아담을 입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리고 빈약한 베네딕도가 이미 새 사람이나 된 것처럼, 새 아담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옷은 그가 그렇게 되도록 힘쓸 의무를 지워준 것이다. 물론 옷이 수도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수도자가 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그의 특권이다.

그가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결심을 드러내는 징표로써 그 옷을 받아 입은 것이다. 그것은 이성을 넘어서서 생의 가장 깊은실제를 표현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징표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이다. 미(美)의 신학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

 

"주 예수여, 이 어떤 선물이며 위엄이옵니까!"

베네딕도는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 하였다.

 

 

거룩한 전승

 

 

 

 

매일 로마누스는 베네딕도에게 먹을 빵을 담은 바구니를 줄에 달아 험준한 절벽 아래 있는 동굴로 내려 주었다.

 

"아버지, 이 빵 안에는 누룩이 있어 - 어떻게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서서히 내 내면 안에서 부풀어나고 있습니다. "

 

"그래 나의 아들아, 이 빵은 여러 세대로부터 준비되어진 것이다. 밀가루가 거룩한 전승을 통해 변화되도록 서로 서로 사랑한 사람들로부터 말이다.

 

너는 네가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어 들이고 있다. 다른 이가 네 앞서뿌렸고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세세대대로 전해 온 사랑은 우리 모두가 우리들의 반지를 끼운 사슬과도 같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너는 철이나 놋쇠 보다 더 강한 이 사슬에 네가 묶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 "

 

 

 

 고 독

  

 

 

  깊은 계곡사이에 좁은 오솔길. 그 아래 굽이치며 흐르고 있는 시내. 근처숲속에서부터 빵조각을 물고 날아오는 까마귀는 베네딕도의 유일한 친구였다. 이것들이 그의 고독을 달래주는 모든 것이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뿐.

인류 가운데 홀로.

하느님 앞에 홀로.

 

그러므로 그는 평화중에, 고요중에, 침묵중에 그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중간 길은 없다:

죽음이냐 혹은 삶이냐.

                 미쳐버리느냐 흑은 무아경에 빠지느냐.

받아들이느냐 혹은 이성을 잃떠버리느냐.

 

이같은 갈등 속에서 베네딕도는 자기 자신의 근본을 발견하였다.

 

그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다.

 

베네딕도. 축복 받은 자. 강복.

그러므로 그 역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진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신에 대한 실망이 더욱 크다. 베네딕도는 자신의 결점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미화시키지 않은채. 아무런 변명도 없이. 매일 매일 그는 자신을 인내롭게 지고 가야만 했다.

 

텅빈 공간: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직 나쁜 것만이 자신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의 밑바닥에 서있고 마음의 악의를 깨닫는다. 그는 완전히 풀이 꺾이었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겸손해졌다.

 

: 그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감히 눈을 들 수가 없었다.

모순: 먼지 속에 꿈틀거리는 벌레와도 같다. 죽임을 당하려 끌려가는양과도 같다. 주인 앞에 서 있는 짐진 짐승과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그가 무한한 자비를 의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공허, 그러나 모든 욕망들, 모든 동경들, 모든 갈망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확신 속에서의 밤,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 안에서 강하고, 그를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자각, 모든 것이 오로지 성령의 선물임을 깨달았다.

 

그는 홀로: 축복을 받았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축복, 선물.

 

 

 

침  묵

말 없이.

그는 교회에 말씀하시는 성령의 소리를 듣기 위해 완전히 귀가 되었다.

 

오늘, 지금, -네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안 - 이 때이다.

잠에서 깨어나라. 일어나라. 깨어라.

조용한 부름에 마음으로부터 귀 기울여 듣거라,

그분이 너를 향해 계신다.

 

"듣거라, 나의 아들아‥‥‥‥어진 아버지의 훈계를 받아들여라.

 

그것이 가능할까?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오늘' 안에서 그리고 시대의 '지금' 안에서 울리는 지속적이며 권능에 찬 말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말 속에서 너는 죄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의 중요성 때문에 너는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누가 귀를 막고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의 마음 무감각해지고 돌처럼 굳어질 것이다. 생명에 이르는 대신 죽음에 이르고 말 것이다.

 

깊은 침묵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베네딕도는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은채 아주 조용히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마음의 귀를 기울였다:

 

"주여, 말씀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