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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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01 16:03
공동생활, 수도원적 전통 4 - 규칙 안에 공동체와 개인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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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안의 공동체와 개인

 

공동체라는 점에서 토의를 끝낸다면 베네딕도의 규칙을 불공평하게 다루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이 문제에서 규칙의 영성 전부를 남김없이 규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영성에는 강한 개인주의적 면이 있다. 공동체는 하느님을 찾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는 자

기 고유의 장점과 약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고려하여야 한다. 공동체는 각 수도승이 하느님을 찾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다. 또한 규칙 안에서 첫재가는 강조점은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놓여 있다는 것도 주장할 수 있다. 규칙의 머리말은 매우 사적이고 개인주의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도원의 생활 방식에로 불린 개인편에서의 회개 과장을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근래의 연구는, 이 머리말의 대부분은 세례받은 자들을 위한 교리서에서 취한 것으로서, 어떻게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해 나갈 것인지를 수도승에게 가르치려고 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했다. 그 안에 포함된 가르침은 겸손에 대한 장, 즉 제7장 끝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수도승의 회개는 성부께 대한 그리스도의 순명을 본받는 순명을 통해서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군대에 들어가 왕이신 그리스도의 기치 아래서 싸우는 군인이 된다. 군주주의적인 이런 표상들이 오늘의 젊은 수련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중요한 영적 표상들이었기 때문에, 표상을 버린다고 그 내용까지 버려서는 안 될 것 같다. 같은적을 대항해서 같이 싸우는 병사들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유대가 형성된다. 매우 남성적인 이 표상들은 언제나 초기 수도원적 생활의 문헌에서 역할을 했고, 그 영적인 내용을 계속해서 검토해야 했다. 머리말에 나타난 회개 과정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그에 대한 수도승 개인의 응답을 머리에 그리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발전 혹은 성장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어려운 순간들을 맞이할 것임으로 특히 기장의 순간에서 항구심이 강조된다.

베네딕도는 이 성장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잇어 스승과는 다르다. 스승에게는 두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악으로 하나는 선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선한 길은 내내 좁다. 누구든지 자신을 언제나 경계해야 한다. 베네딕도는 완덕의 길의 입구가 좁고 험한 것으로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서만 시작할 수 있다. 그 길에 어려운 순간들이 있으리라는 것, 그러나 누구든지 하느님의 계명의 길을 달릴 때,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감리로 부풀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 완전히 참여하도록 하는 인내심을 얻는다는 것을 그는 인정한다. 베네딕도는 수도적 회개 시초에 지옥과 벌에 대한 공포를 있음직한 자극들로 본다. 그는 이것들을 겸손의 첫째 단계에서 서술한다. 그러나 그는 열두 단계 모두를 열거한 후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겸손의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두려움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이제는 별로 어려움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모든 계명들을 지키게 된다는 말이다. 이제 주께서는 악습과 죄악에서 깨끗하여진 당신 일꾼 안에서 성신을 통하여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

 

이 문장 역시 스승의 규칙서에 그 직접적 출처를 그리고 가시아노 회칙에 최종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베네딕도는 중요한 한 가지를 고친다. 이교적 문헌에서 의지하는 앞의 두 저자들은 와덕을 반복에 의해 용이하게 되는 도덕적 습관으로 본다. 베네딕도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에서”라는 중요한 구를 첨가한다. 그는 이같은 구를 순명을 다루는 데서도 첨가한다. 베네딕도에 따라 수도승 안에 생겨야 할 영적 성장은 동기하고 관계가 있다. 수도승은 한때 어려움의 동기에서 해하던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비록 문이 좁기는 하지만, 베네딕도는 수도승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라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유대에서 자라는 것을 본다. 그가 수도원 규칙을 외적으로 준수하는 것은 같지만, 내적 성장은 일어나야 한다. 이 성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스도와의 그의 유대가 참된 사랑의 관계에까지 깊어 질때, 그것은 아빠스의 대한 그의 관계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그의 관계를 채색하고 바꿀 것이다. 지혜롭게도 베네딕도는 순명을 다룰 때와 수도원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애의 관계에 대한 제71장 끝에서 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개념에로 다시 돌아온다.

각 수도승편의 영적 성장은 홀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베네딕도는 성령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지 않는다. 규칙은 완전히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채워져 있어서 성령을 동한시했다고 느낄 정도다. 그렇지만 베네딕도가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는 두 번의 중요한 기회가 있다. 하나는 수도적 회개의 시작에 그리고 다른 것은 끝에 있다. 머리말에서 베네딕도는 회개를 “듣는것”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사람은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그리고 다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신 바를 들어야 한다.”그러면 성령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아들들아, 와서 내 말을 듣거라, 주님의 두려우심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겠노라.” de Vogue와 같은 현대 규칙 해설가는 베네딕도가 성 마태오의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시오”(11,15)와 묵시록의 구절에서 “성령께서 여러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를 배합한 방법에 당황한다.

이 구절이 아우구스티노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거기서는 균현이 완전하고 이 두 텍스트가 여기서와 같이 거북하게 연결됨으로써, 균형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증명한다. 비록 베네딕도가 그 균형을 깨뜨렸을 지라도, 그는 회개의 시작, 회개에로의 부르심은 성령의 업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묵시록에 대한 특별한 언급도 이 부르심을 단지 개인주의적이 아니라, 교회적 성질로 만들고 있다. 머리말에서 베네딕도는 이 부르심을 복음서의 비유 안에 있는 일꾼의 그것과 비교한다. 이와 같이 그의 영적 가르침 끝에 즉 겸손에 대한 제7장의 결론으로 베네딕도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제 주께서는 악습과 죄악에서 깨끗하여진 다인 일꾼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 사실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다.”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의 성장 과정은 수도승 안에서의 성령의 업적이다. 규칙안의 중요한 곳들에서 역할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성령에 대한 이 두 문구는 수도승 안에 있는 영적 각성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의 성장을 지도 아래 놓는다.

비록 베네딕도가 규칙을 일종의 정적인 요소-계율-로 생각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는 수도원적 생활 방식을 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아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의 성장으로 보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성장이다. 성장은 완덕과 성령인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지 계율이 아니다. 계율은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된다.

개인과 그의 하느님 탐구에 대한 이 관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베네딕도가 이야기하는 개인기도, 독서, 아빠스와 수도승 사이의 관계, 기타의 건에도 언급이 있어야 한다. 개인,공동체 및 아빠스 사이의 관계들은 베네딕도가 그의 처벌 규약을 설명할 때에도 밝혀진다.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처벌 중의 가장 엄한 것이고, 범죄의 경중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이런 류의 벌은 수도승이 공동체를 그가 하느님을 탐구하는데 있어 불가결의 요소라고 간주할 때만, 치료하는 약이 된다.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랑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