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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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9-01 16:02
공동생활, 수도원적 전통 5 - 제2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공동체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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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의 공동체

 

이 글의 시작에 언급한 현재의 상태에 되돌아가자. 나는 이 지난 7년 동안 400이 넘는 남녀 수도 공동체를 방문하는 특전을 가졌었지만, 다음이 내가 본 것에 대한 분석 전부임을 네세울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일련의 주장 혹은 진술들속에서 발견한 것을, 그들 간의 논리적 연관에는 개의치 않고 종합해 보겠다.

 

1. 오늘날에는 은수 생활에 대한 흥미가 다시 일기 시작한다. 비록 그것을 “도피주의”의 방편으로 사용하는 수가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이 경향에 따름으로 행복해지는 확실한 영적 깊이의 충분한 표시들도 있다. 성 베네딕도는 은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단체 생활을 경험하고, 그런 경험을 쌓은 후에야 사막에서의 고독한 싸움에 임하기를 바랬다. 불행히도 내가 만난 은수자들의 75%는 먼저 단체 생활에서 충분히 훈련된 남녀들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도피주의자들 그리고 공상가들임을 나는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몇 사람은 그들이 살고 있던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을 특정 지운 초조직화에 반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인간적 애정과 우정을 사안시 하고, 순종이 보답을 받는 유일한 미덕이고, 내적 성장보다는 외적 규율 준수에 중점이 놓였던 수도우너들에서 살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그 존속 자체가 도전 받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변화나 발전에도 위협을 느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수생활은 어떤 기만에서의 도피처럼 생각된다. 그런 공동체가 많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마 모든 공동체가 약간은 이런 자세들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기 위해서, 남은 25%는 순금, 진정한 관상가 및 신비가들이라는 것을 덧붙인다. 그들의 암자들은 진정 그들이 하느님 탐구를 집중적으로 계속하는 방편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이 경향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한 “잠정적” 은수자들이 되는 칭찬할 만한 운동이 있는데, 이것은 더 짙은 침묵과 고독의 때를 가지려고 얼마 동안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은 가장 바람직한 것이고, 또한 일층 활동적인 현대사회의 리듬을 조정한다. 그것은 동시에 내가 이미 말했고 후에도 말하겠지만, “공동체”에 대해 좀 지나치다 싶은 최근의 강조와 역설을 조정한다. 일정 기간의 은수생활에 대한 이 경향은 개인들과 공동체들, 양쪽에 유익했다.

 

2.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수도원들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데 있어 적극적인 가치로서의 “공동생활”에 대한 의식이 새로워졌다. 전 공동체 안에 그리고 각 지체 안에 성령이 현존하신다는 의식은, 하느님 백성과 신도의 더 적극적인 참여에 대한 공의회의 사상으로 높여졌다. 규칙 제3장은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였다. 구원과 구원 역사의 공동체적 국면들에 대한 재건된 신학 사상은 수도원적 공동체의 개념에 영향을 미쳤고, 다시거기에다 더 적극적인 내용을 부여했다. 홀연 수도원은 서로 별로 교류가 없는 사람들의 물렁한 집단이 아니라, 하나의공동체로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이 견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 말할 수 없고, 오직 그 강조가 새로운 것이었다. 누구나 이러이러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끝이고, 이러이러한 공동생활에 가입했다. 누구나 타인 안에 계신 성령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점점 의식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공동체 생활의 묵은 계획들을 바꿨다. 즉 참여와 대화는 침묵과 묵상보다 더 주요 단어가 되었다. 상당히 적극적이고 좋은 결과들을 얻었다. 나는 그 중에 세 가지를 열거하겠다.

 

ㄱ) 공동체 전례 기도는 진정 공동체를 위해 각별한 영양분을 공급하도록 쇄신되어야 함을 느꼈다. 지방 그룹의 개별적 요구에 응하고 각 그룹 안에서 느껴지는 창조적 충동에 기회를 줄 수 있도록 더 큰 유연성이 필요했다. 이 조화를 얻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고, 현재로는 아직 위에 말한 요소들, 즉 전례의 전통, 각 그룹의 요구, 창조적 배출구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탐구의 단계에 있다.

 

ㄴ) 둘째로, 결의하는 데 있어 이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규칙 제3장이 진지하게 취급된다. 이것이하나 이상의 다수를 성령과 동일시 하는 따위의 오류를 초래한 몇 가지 예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것은 살아 있는 공동체와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과 가까이 있을 필요를 느끼는 새로운 종류의 통솔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경우에 그 결과들은 매우 긍정적인 것이었다. 아빠스의 역할은 영적 고무자와 식별하는 사람의 그것으로 복귀한다. 어디선가 이 운동으로 해서 권위에 대한 존경이 적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경우들에서는 권위가 이미 그리스도교적 혹은 수도원적 방법으로서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행사되었고, 그리하여 장상들은 위협을 느껴서 과잉 반응을 한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성싶다.

 

ㄷ) 셋째로, 중세기 수도 생활의 관습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반면 베네딕도 이전의 수도생활, 특히 바실리오와 빠꼬미오에서 볼 수 있는 수도원적 전통에 대한 관심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수도 생활의 기원에 대한 논문이나 서적들 그리고 베네딕도로 시작된 수도원적 관습의 구체화로 이끈 전반적 흐름들의 윤곽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의 숫자는 엄청난 것이다. 이 사실은 그것이 동양 및 비그리스도교적 수도 생활과의 더 나은 이해와 접촉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유익한 것이었다.

 

3. 공동체, 특히 작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과잉 강조함으로써 오늘날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 같은 과장이 있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지금은 작은 공동체들도 문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작은 공동체 안에 현존하는 그 많은 시도들을 불평과 불안에 떠는 수도승들이 떠맡고 있다는 것 역시 불행한 일이다. 그들이 이렇게 실패한 것은 기본적 이론 때문이 아니라, 준비의 부족과 시도들을 떠맡은 사람들의 편에 있는 부정적인 태도들 때문이다. 작은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개인적 및 사회적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감정적 혹은 독신생활 문제 때문에 더 작은 공동체를 택한 사람들은 얼마 가지 않아서 그곳을 떠났다. 나는 이점에 있어 다수주의가 전반적 수도 생활, 그리고 특히 봉쇄 수도원 생활을 위해 건전한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에, 이러한 과정들은 지탄을 받아야 하지만, 계속되는 시도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미국에는 많은 수도승들이 큰 수도원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종교 및 인간적 감정을 위한 적절한 환경을 그 안에서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나는 현재의 수도원 생활의 위기는 한편으로 은수생활의 부흥에 의해 특정 지워진다고 말하고 싶다. 남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수도원적 전통을 살찌게 하는 것임은 명백하다. 공동 생활방식 역시 하느님을 찾는 데 있어, 멀지 않은 과거에는 덜 중요시되었던 가치였지만, 공동체가 적극적인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가졌다는 이해로 해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이 가치는 지나친 심리학적 단계들을 거치고, 때로는 과도하게 확실한 것으로 되어서, 탐구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그 역할을 잃어버리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참된 영적 소득물 이었다. 오늘의 수도 생활의 임무는 이 새로 얻은 인식을 침묵, 고독 및 내면성이라는 타의 수도원적 가치들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 조화에 있어 한편으로 거짓 감수성을 기르는 훈련소가 되거나 혹은 다른 편으로 비사회적이고 내성적인 은수자들의 집단이 되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만일 수도원 공동체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눈앞에다 두고, 정신과 마음, 그리고 아무에게도 부족함이 없도록 물건을 소유하는 데 있어 일치하고,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매일의 하느님 찬미에 충실하면, 그러한 수도원 공동체는 성령이 각 지체들에게 주신 선물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 데 이바지 할 것이다.

 

이딸리아,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