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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0-07 20:57

이 세상 나그네 되어

글쓴이 : 인 끌레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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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航海)
한 사람이 바다 건너편 도시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탑니다. 배는 닻을 올리고 항구를 빠져나가 넓은 바다를 향해 갑니다. 잔잔하던 물결이 넓은 바다로 나아감에 따라 점차 사나워집니다. 바라는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오직 끝없는 바다, 나그네는 갑자기 겁이 납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자기가 떠나온 항구가 저 멀리 아른거립니다. 저기에 있을 때는 안전했었다는 생각에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돌아갈까? 돌아가면 안전한 땅 위에 다시 닿겠지만, 부모님께는 언제 돌아가지? 나그네는 갈등을 겪습니다. 바람이 불면서 파도가 더욱 거세어지고 나그네는 더욱더 되돌아가고픈 마음뿐입니다. 배가 부서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험한 과정을, 바다에서의 시간을 조금만 견디면 안락한 부모님 집에서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북돋우고, 그러다가 하늘에 보이는 시커먼 구름에 다시 풀이 죽고.

옛 사람들은 세례성사를 항해에 즐겨 비교하였습니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배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였기 때문입니다. 넓은 바다의 성난 파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세속적 유혹의 상징이었습니다. 파도를 피해 항구로 되돌아가고픈 선원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때 겪어야 하는 수많은 어려움으로 신앙을 포기하고픈 유혹에 시달리는 신앙인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험난한 바닷길이라 해도 기어이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배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굳센 신앙인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나그네: 무소유의 자유
정착하는 이는 끊임없이 물질에 욕심을 내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필요한 것은 모두 모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중에 행여 사용할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자기 곁에 차곡차곡 쌓아 둡니다. 물건을 쌓아 둘 창고는 자꾸만 더 커집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권력층에 아부하고 뇌물을 바치기도 하며, 힘없는 사람에겐 무자비합니다.

길 떠나는 나그네는 많은 짐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가는 도중에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고 떠나면 중도에 지치고 말 것임을 잘 알기에, 꼭 필요한 것 외엔 더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물질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를 억누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습니다.

나그네: 기득권의 포기
정주(定住)한 이는 자신이 차지한 재산과 권익을 유지, 보호하기 위하여 새 제도와 법을 만들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등 끊임없는 노력을 합니다. 필요하다면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을 쥔 이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칩니다. 그가 악인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소신도 오늘 거침없이 바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판단하여 경계하고 감시하며 억누릅니다. 그에게 있어 선(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겨 처벌하고자 합니다. 친구란 자신의 권익 유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하느님이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주고 양심을 편안하게 해주는 만능 도구이자 사후생활을 위한 보험입니다.

이 세상에 잠시 왔다고 생각하는 나그네는 이런 기득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발길을 붙드는 귀찮은 것, 하나의 유혹으로 여깁니다.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단 하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존 세력에 아부할 필요도, 기득권자에게 빌붙기 위해 비굴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말하고 옳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다른 이들의 질시와 미움에 그다지 개의치 않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가야 할 곳이라고 여기는 곳에 계신 분(하느님)의 눈에 옳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나그네: 불안과 희망의 삶
한 곳에 정주하고 싶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양지를 찾아갑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 자신의 몸이 안락하게 쉴 수 있는 곳, 다른 이들로부터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곳, 한마디로 자신만의 요새를 쌓아 갑니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힘뿐이고,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이라고 여기기에 쉴틈 없이 자기 둘레에 울타리를 쌓아올립니다. 마침내 다른 이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기까지, 그의 안주하고픈 욕망은 그칠 줄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방해되는 사람이나 제도를 없애거나 멀리하게 됩니다. 적당히 불의와도 타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합니다. 이 정도면 되겠거니 하고 자신을 둘러보지만, 추구하는 만족과 안정은 언제나 구멍이 뚫려 있게 마련이니까요.

나그네는 불안합니다. 먹을 것, 잠잘 곳, 입을 것 하나 보장되지 않습니다. 적대자들로부터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릅니다. 혼자 있기에 기득권자들로부터의 보호가 없고, 사람들의 공격과 비난, 희생양의 대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자신을 감싸줄 울타리, 자신의 처지를 동정하고 이해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에게 노출된 삶, 그래서 그는 발가벗은 아이와 같은 처지입니다. 하지만 그에겐 갈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면 편히 쉴 수 있기에 어느 한 곳에 정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불안하지만 그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나그네
세례로써 이 세상이라는 항구를 벗어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이 세상의 나그네입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자신의 편이 되어 주심을 알기에, 불안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아니, 이 세상으로부터 안정을 찾을 수 없기에 하느님께만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안을 느끼기에 그는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을 계속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파도, 폭풍우, 끝없는 바다가 그를 불안하게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등대를 좇아 어둠을 뚫고 나아갑니다. 비록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는 한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 "하느님, 이제껏 당신께 가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할 수 있는 그는 행복할 테니까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