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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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0-08 20:01
십자가 옆에 서 계신 어머니 (십자가 처형 이콘)
 글쓴이 : 인 끌레멘스 신부
조회 : 11,769   추천 : 0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갈등과 고통은 피하고 싶어 한다. 될수록 편안하고 아늑한 삶을 원한다. 그러나 인생 여정은 그리 말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고통스럽다. “하느님,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안겨주십니까?”, “제가 무슨 죄를 그리 지었기 때문에 이런 아픔을 주십니까?” 수도생활을 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수도원의 크고 작은 일 때문에 또 형제들과의 관계 때문에 갈등을 겪고, 이러한 고민으로 밤잠을 설칠 때가 있다. 자문한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려고 수도원에 들어왔나?” “이런 고통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내 힘만 빼고 나를 더욱 옥죄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상처에서 오는 삶의 무게는 그 자체로 무겁다. 그래서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던가.

우리는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다. 은혜의 시기 동안 특별히 십자가의 길을 자주 바침으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 이 고통과 수난의 길에서 우리는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 옆에 서 계신 어머니 (Stabat Mater)의 고통스런 마음도 생각한다. 아드님의 십자가는 곧 성모님의 십자가였다. 특히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이콘은, 아드님의 죽음으로 받은 성모님의 내적 상처 안에서 우리가 일상 삶에서 받고 있는 상처의 깊은 의미를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든다. 이 이콘은 러시아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500년에 그린 ‘십자가 처형’ 이콘(85×52)이다.

먼저 우리 눈은 이콘의 인물들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향한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성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모욕을 받으시고 피와 땀으로 임종의 고통을 겪고 계신 분이 아니다(마르 15,29-32 참조). 예수님의 육신에는 어떠한 고통의 표지도 없다. 기쁨에 넘쳐 춤을 추고 계신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사실 예수님은 시편 22편을 기도하고 계신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시편 22,23). 그리스도께는 당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구원되었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시고 기쁨에 넘쳐 십자가 춤을 추고 계신 것이다. 이콘 작가는 실제로 골고타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십자가 처형을 그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십자가 오른편 끝에 서서,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백인대장은 흰 모직으로 머리를 두르고 있다. 이콘에서 흰색은 영적 실재를 상징한다. 그는 골고타의 장면에서 그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영적으로 읽는다. 외적 눈으로 신적 차원을 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하고 신앙을 고백한다. 백인대장 옆에 있는 사도 요한은 머리를 숙이고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자신이 본 것에 마음을 온전히 몰입한 사람의 관상적 태도를 표현한다. 먼저는 저녁에 주님의 가슴에 머리를 대었던 제자이고(요한 13,23) 지금은 신비로운 임종 가운데 있는 주님을 관상한다. 마음은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있게 보는 성모님은 다른 이콘에서 보는 바와는 달리 고뇌에 찬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다. 주님의 어머니는 뺨에 손을 대고 있는데, 이는 이콘에서 혼란과 의심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자세이다. 성모님의 눈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는 아드님의 얼굴을 향하고 있다. 성모님을 둘러싼 부인들은 고통스런 성모님을 위로하고 있다.

사실 고통은 우리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신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시련과 고통 앞에서 인간의 위대한 신비가 드러난다. 교부들의 말에 따라 고통 안에서 인간은 시험에 패배하거나 그리스도화 된다. 고통은 도가니와 같다. 쇠를 정련할 수 있지만 찌꺼기만 낼 수도 있다. 그래서 고통은 시험의 장이다. 성모님도 이 고통스런 시험의 한 가운데 계시다. 성 바실리오를 비롯한 교부들은 동정녀의 영혼을 뚫어야 하는 칼에 대한 시메온의 예언(루카 2,35 참조)을 십자가 아래에서 깨끗하신 분의 마음을 꿰뚫는 의심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무엇을 의심했는가? 동정녀는 아드님의 신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아드님의 인성 안에서 하느님이 이렇게 낮아지는 것을 보고는 혼란에 빠진다. 천사가 다윗의 옥좌를 계승할 것이며 그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고(루카 1,33 참조) 한 아드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죽어야 하는가? 이러한 의심들을 흩어버릴 새로운 계시를 그리스도 친히 하신다. 그분은 스승이요 말씀 자체이시며 하느님의 지혜로서 십자가에서 어머님께 마지막이지만 가장 심오한 지식을 조용히 가르치신다. 곧 십자가의 지혜(1코린 1,17이하)로서, 굴욕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는 눈을 선사하신다. 이제 성모님은 외적 눈으로는 폭력적인 장면을 보지만 맑아진 내적 눈으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외적 눈으로는 죽음을 보지만 내적 눈으로는 생명을 경외하며, 외적 눈으로는 죽은 한 사람을 보지만 내적 눈으로는 부활하신 구원자를 관상하신다.

우리에게 상처는 참된 하느님을 경험하는 본질적인 장소이다. 성모님도 당신 아드님의 십자가 옆에서 영혼이 칼에 찔릴 때 참된 하느님을 알아보게 되셨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결코 무의미한 것,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피가 흐르는 상처의 밑바닥에서 오히려 우리는 내적인 평화를 깊이 체험할 수 있다. 거기서 고통과 함께, 나를 받아 주시는 분으로서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나의 고통은 그분의 선한 손안에 함께 있다. 이제 나의 상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의 상처이고 그분 안에서 구원의 상처가 된다. 어차피 져야 될 십자가, 기쁘게 져야 하지 않는가.

성모님께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

성모기사 4월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