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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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0-08 19:56
봄과 함께 다가온 기쁜 소식(주님탄생예고 이콘)
 글쓴이 : 인 끌레멘스 신부
조회 : 10,892   추천 : 0  
 
 
어느덧 봄이 우리 가운데 살며시 내려왔다. 봄은 생명이 움터나는 계절이다. 만물이 생명을 만끽하는 이 봄에 교회는 전례 거행 안에서 성모님과 그분께 내리신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경축한다. 바로 루카 복음사가만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주님 탄생 예고 사건이다(루카 1,26-38). 유다 산골 마을 나자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는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 (콜로 1,26), 곧 하느님의 말씀께서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실 것이라는 계시를 받으신다. 성모님은 이 예고에 몸과 마음으로 동의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을 성령의 업적으로 잉태하신다.

나자렛에서 일어난 놀라운 신비는 우리 구원의 개막을 알리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교회는 성탄 시기 외에 3월 25일에도 특별히 경축한다. 날짜의 선택은 12월 25일부터 아홉 달을 앞으로 역산한 것으로서, 예수님은 참 인간으로서 여느 인간들처럼 어머니 태중에서 아홉 달을 거쳐 탄생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택했다. 이 대축일은 6세기경 동 로마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작하여 모든 교회가 같은 날 경축한다. 비잔틴 교회에서는 이 축일을 “기쁜 소식” 혹은 “거룩하신 천주의 모친 탄생 예고”라고 한다. 우리 서방 교회에서는 이전에는 성모님의 축일로서 “성모영보”라고 했지만, 전례 개혁 이후 지금은 주님의 축일로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로 이름을 바꾸어 지내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주님 탄생 예고 이콘은 12세기 후반 그리스 목판화 (57x42cm)이며 현재 시나이의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콘의 제목은 황금색 바탕에 붉은 글씨로 이 축제일의 다른 이름인 그리스말 “O XAIPETICMOC”(호 카이레티스모스), 곧 “문안”라고 되어 있다. 이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오른손을 들어 인사하면서 마리아께 하느님의 뜻을 전할 때 한 첫 말인 “기뻐하여라”, 그리스말로는 “카이레” (루카 1,28)에서 나온 것이다.
많은 이콘 작가들은 정경을 중심으로 이콘을 그리면서도 외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풍부히 받아들인다. 특히 오늘 이콘에는 외경 복음서 가운데 하나이며 예수님의 유년기 이야기를 많이 전해주고 있는 야고버 원(元)복음서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성모님이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천사의 전갈을 받는데, 야고보 원복음서에서는 서로 다른 때와 장소를 통하여 사건을 분리하고 있다. 우선 동정녀가 물을 길으러 우물에 갔는데 어디에선가 소리가 나며 “기뻐하여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도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마리아는 무서운 마음이 들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 안에 걸상에 앉아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이 부탁한 성전 휘장을 열심히 짜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라고 말하여 잉태를 전한다.

이콘에서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진기한 넓은 나무 의자의 진홍색 방석에 앉아 계신다. 야고버 원복음서에 기록되어있는 대로 예루살렘 성전 휘장을 짜는 중이시다. 마리아는 왼손에 진홍색 실타래와 오른손에 실을 들고 계시다. 이 장면에는 깊은 신학적 의미가 숨어있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형상으로 번역하는 ‘사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다” (마태 12,48-5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면서 천주의 모친으로서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이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육신을 짜시는 동정녀의 손에 든 실은 붉은색인데, 이는 색은 신성을 나타내는 색이다. 반면에 마리아는 녹색과 파랑색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피조물을 드러내는 색이다. 사실 녹색은 지상의 색이고 파랑색은 인간성의 색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가리키려는 목적으로 마리아께서는 붉은색 망토를 입고 계신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셨고 그분께 공간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붉은색 실은 그리스도의 육신만이 아니라 성모님의 육신도 상징하고, 마리아는 말씀께 자리를 내어주시면서 구원되신 존재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동정녀는 천사의 고지에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시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여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계시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이다(루카1,29). 하지만 이 생각은 단순히 이성적 생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숙고하는 관상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리아의 시선은 천사가 아니라 비둘기에게 고정되어 있고, 천사 역시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다. 이콘 제목 밑에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성령의 상징으로 비둘기가 나는 장면이 그려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어 육화를 이루신다. 빛이 하늘에서 비둘기를 관통하여 마리아의 몸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마리아의 “피아트”(이루지기를 바랍니다)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힘이 인간의 힘과 결합되어 예수님께서 잉태되셨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밑 부분에 온갖 꽃과 짐승이 땅을 덮고 있다. 더 밑에는 물고기와 다른 짐승들로 가득 찬 냇물이 흐르고 새들은 깃털을 고르거나 먹이를 잡고 있으며 냇가에는 싱그러운 풀줄기가 솟아오른다. 생명수는 “나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생명수가 솟아나는 샘이 바로 마리아이시다. 또한 성모님 뒤에 자리한 건물 위에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고 그 지붕 위에는 암수 한 쌍의 새가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장면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 오는 봄을 상징한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날이지만, 이콘에서 드러내는 바와 같이 동정 마리아께 우리의 눈을 뗄 수가 없다. 하느님의 은총에 인격 전체로 동의하셨으며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자유롭게 협력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 구원과 생명이 이 땅에 임하셨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생명 자체이신 분을 잉태하고 낳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하자.

(성모기사 2007년 3월호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