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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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9-27 21:49
첫사랑과 고무신
 글쓴이 : 허 로무알도
조회 : 8,554   추천 : 0  
"첫사랑과 고무신"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첫사랑이란 것이 있다. 이 말은 듣기만 해도 우리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우리가 세상물정에 밝지 않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던 순수하고 낭만적인 시절을 연상시킨다. 첫사랑은 풋사랑이지만 거기에는 순수와 열정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몸과 머리가 커지면서 어느덧 첫사랑은 퇴색되고 식어간다. 그래서 소위 고무신을 꺾어 신게 된다. 우스개 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은 얘기인데, 사랑하는 남자가 군에 입대할 때 그 애인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고 한다. 즉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작". 예전에는 여자가 변심하는 것을 두고 흔히 고무신 꺾어 신는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예 신 자체를 바꿔 신는다. 지조 없는 현 세태를 반영해 준다. 옛날에는 고무신 꺾어 신기까지 실로 많은 고민과 갈등의 과정이 있었지만, 요즘은 과연 그런 과정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너무 쉽게 변심한다.

사랑은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그래서 여기에는 서로간에 신의와 충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없이 사랑은 화려하고 달콤한 환상일 뿐이다. 첫사랑의 순수와 열정은 상대에 대한 신의와 충실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우리는 첫사랑을 기억하고 거기에로 되돌아가야 한다.

갑자기 왠 난데없는 사랑 얘기냐고 누가 물을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삶과 너무 비슷해서 그렇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을 하느님으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하느님과의 첫사랑을 경험하였다. 그 사랑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 가치기준, 심지어 우리의 전 삶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를 이런 별난 삶으로 이끌었다. 그만큼 그 사랑은 강렬하다. 물론 사람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랑이 없이 수도생활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 사랑이 약할수록 그만큼 이 삶은 어렵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우리의 이 첫사랑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퇴색되고 식어간다. 따라서 늘 첫사랑을 기억하고 거기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차갑게 식어 가는 우리 마음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때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초기의 순수와 열정이다. 우리 삶은 이것을 되찾기 위해 늘 첫사랑으로 되돌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수도생활은 자기반성을 통해 끊임없이 그 원천에로, 초기의 열정과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삶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느님과의 첫사랑으로 되돌아가자. 우리가 수도생활 초기에 가졌던 순수와 열정에로 되돌아가자. 반복되고 단조로운 삶, 어떤 도전이 없는 삶, 편안하고 안락한 삶은 이것을 방해한다. 의식하지 않으면, 깨어있지 않으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이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 하느님께 대한 신의와 충실을 지킬 수 없다. 소위 고무신 꺾어 신거나 새 신을 신는 결과를 낳는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눈이 풀리고 어깨가 처지면 끝장이다. 이상하게도 수도생활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드러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 안에서 그렇다. 지원자의 모습과 종신서원자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스스로 부단히 채찍질해야 한다. 불가의 납자십계(衲子十戒)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옛사람 참선할 때 촌음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이리 방일한고.
옛사람 참선할 때 잠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이리 방일한고.
옛사람 참선할 때 하루해가 다 가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이리 방일한고.
내 마음을 닦지 못하면 여간한 계행과 적은 복덕이 도무지
허사로세.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의 열정과 치열한 자세를 잘 보여준다.

이제 서서히 2002년도 저물어가고 있다. 참으로 유수같은 세월이다. 한번 흘러가 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 귀한 시간들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은혜로운 시간들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도록 깨어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