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HOME > 자료실 > 오늘의 강론  

  오늘의 강론  
제 목 :  사순 제4주일(가해,2017.03.26) - 고 이사악 신부 17-03-30 08:44: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92   

오늘 우리가 들은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는 고대 교회의 세례준비 예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5-6세기부터 사순 시기는 부활대축일 밤에 베풀어지던 세례성사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입교 지원자는 우선 개인적으로 교리교사에게 약 3년 동안 교리를 배웠습니다. 상당한 교리지식을 습득한 후 지원자는 교회에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알립니다. 그러면 예비자로 등록되어 교회에 나와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지도 받았습니다. 부활 대축일 3주전부터 예비자들은 매일 미사에 참석하여 주교나 사제의 강론을 들으며 세례를 받을 마지막 준비를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죄, 통회, 보속, 단식 같은 사순시기와 관련된 주제들이 아니라 세례성사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내용들로 구성된 독서가 낭독되었습니다. 

사순 제3주일에는 요한복음 45절에서 42절까지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 사순 제4주일에는 요한복음 91절에서 41절까지 나오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 그리고 사순 제5주일에는 요한복음 111절에서 45절까지 나오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가 낭독되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예비자들에게 세례성사의 본뜻을 새겨주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를 짚어줍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활력을 주고 생기를 북돋워 주는 것은 끊임없이 샘솟는 생명수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할 새로운 안목과 시각을 말해 주고,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통하여 인간이 지닌 최대의 한계이자 약점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는 우리가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눈이 멀어 있었음을 은유적으로 알려줍니다. 여기서 눈은 육체의 한 감각기관인 육안(肉眼)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오감을 사용하여 사물과 상황을 인식하고 식별합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가지 감각 중에 인간의 인식과 식별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시각입니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지만 사람마다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육안은 표면적인 상황만을 인식할 뿐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숨어 의미를 알아채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실로암 못에서 일어난 기적은 단순히 소경이 다시 시력을 찾은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 세상과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었기에 기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소경은 육안이 열렸을 뿐더러 순간 영안도 열렸습니다. 그 소경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은 확고하고 명징합니다.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당당히 자신이 깨달은 바를 옹호합니다.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를 부르는 호칭이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그 소경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바리사이들에게 그를 데려갔을 때는 예언자가 그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리사이가 다시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눈먼 거지에서 확고한 신념을 소유한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난 일은 기적이라고 밖에 다른 말로 표현한 길이 없습니다. 

눈먼 소경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과정은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깨우쳐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예수는 우리 일상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일뿐입니다. 보인다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멀었다는 말은 어디에 집착하고 있다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도 많이 예수의 기적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기적을 보고도 하느님의 영광을 찾지 않고 오직 예수를 죄로 옭아매어 죽음으로 몰아갈 궁리만 했습니다. 율법과 죄에 집착한 나머지 바리사이들은 문자로 된 규정 너머에 있는 빛과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를 처음 만난 소경조차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건만, 예수의 숱한 기적을 수사관이 수사하듯 살피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죽일 죄인으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남긴 마지막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차리리 맹인이라면 죄가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본다고들 말하고 있으니 당신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예수의 이 말씀은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시각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린 지혜의 영, 분별의 영을 통하여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현실을 왜곡하고 세상을 기만하는 세력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관심을 세속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번영에 매어두어 세상을 점점 악의 구렁텅이로 만들어 갑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이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분별의 지혜는 조작된 정보가 난무하고 왜곡된 사실이 통용되는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우리 사회에 거짓으로 포장된 신화들이 떠돌아다는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일제의 근대화 신화, 이승만의 건국 신화, 미국의 혈맹 신화, 박정희의 개발 신화, 삼성의 혁신 신화, 현대의 토건 신화 등등 기득권 세력을 비호하는 언론과 자본 그리고 어용학자들이 우리에게 주입시킨 그릇된 관념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마저 뿌리깊이 박혀있습니다. 이 신화에 토를 다는 사람은 무조건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낙인이 찍히고 맙니다. 심지어 일부 몰지각한 신자들이 건전한 이성적 시각으로 사회를 비판하며 건설적인 대안을 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니 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고정된 사고나 편협한 신념에 매어 사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찾아 완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찾은 진리가 소중하다면 남이 찾은 진리 역시 소중합니다. 어느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진리의 단편들을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본 진리의 단편들을 공유하고 통합하면서 진리의 실체에 다가가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진리를 깨달았다고 인정받은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진리를 찾는 일은 어렵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진리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목숨 바쳐 증명해낸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신봉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름의 우상을 섬기며 신화를 만들고자 애쓰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하느님께도 절대 양보하지 못하는 내 영역을 한 가지씩은 고수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거짓인줄 알면서도 진실이라고 우기고 싶을 때가 있고 진실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진실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들며 때로는 어리석게 보이는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우리 스승인 예수처럼 목숨까지는 바치지 못하더라도 진리를 비추는 촛불 하나 켤 정도의 삶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리를 깨달은 자는 자유롭고 기쁨에 넘칩니다. 예수께서는 이 기쁨을 우리와 나누려 하신 것입니다. 혼돈과 혼란의 시대에 살아갈지언정 눈을 감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더 꼼꼼히 살펴보시라고 당부드립니다. 또한 오감을 활짝 열어 우리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제대로 하느님을 알고 있는지? 우리가 제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우리가 제대로 삶의 묘미를 맛보고 있는지?” 육안으로 보면 우울하고 절망적인 세상, 마음 둘 곳 없이 황량한 현실이지만, 그 어딘가에 숨어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영안이 열린다면 기쁨이 늘 우리와 함께 머물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시에 나오듯,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뜨여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추천하신 회원님 : 0 명

♡한마디의 아름다운 댓글이  관리자님과 우리 모두의 마음을 풍요롭게 합니다♡ 조회 : 1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