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블라시오 성인의 축일을 지내며 순교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블라시오 성인은 아르메니아의 주교였고, 박해시기에 붙잡혀 혹독한 고통을 이겨내셨고, 316년경에 순교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목에 가시가 걸려 사경을 헤매는 소년을 기적적으로 치유한 일화 때문에, 2월 3일이 되면 성당에서 목을 축복하는 ‘블라시오 강복’이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블라시오 성인은 316년에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하셨지만, 우리는 작년에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년을 회고하였습니다. 100년 전, 1915년에서 1918년에 걸쳐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 오늘날 터키에 의하여 약 150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이유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억합니다. 대원군의 폐쇄 정책과 궤를 같이 하여 일어났던 이 박해 동안 최소 8천명의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천주교 신자 거의 절반이 순교하였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삶의 근거지를 잃고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2014년 광화문에서 시복식을 통해 과거 이 땅에서 순교하신 분들을 장엄한 양식으로 복권시켰지만, 신앙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공동체 역시 1949년을 전후해서 북한의 공산당 정권에 의해 억압을 받고, 순교를 하신 덕원의 순교자 38위에 대한 시복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9년 수도원 100주년을 전후해서 시작된 시복시성 운동을 위해 공동체 전체가 기도하고, 필요한 절차들을 하나하나 진행시켜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들을 통하여 과거 우리 수도 선배들이 겪었던 고초를 더 잘 알게 되었고, 그 분들의 선교 정신과 순교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이 시복시성에 관여하고 있는 형제들의 수고로 많은 작업들이 마무리 단계에 있고, 올해 상반기에 로마로 청원 문서들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를 가로지르는 떼베레 강이 있습니다. 이 강 중간에 ‘티베리나’라는 섬이 있습니다(Isola Tiberina). 그곳에는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이 있는데, 2008년에 20세기와 21세기의 신앙의 증거자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성당을 꾸며 놓았습니다. 그 성당에는 현대의 순교자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관하며, 현대에서도 박해 받으며, 신앙을 증거한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박해를 받은 사람들, 독일 나찌즘, 아메리카에서 박해를 받은 순교자들. 아시아와 중동, 오세아니아, 스페인, 멕시코, 아프리카에서 피살된 주교, 사제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숙연해진다. 정말 피의 증거를 통해 우리 신앙이 이렇게 전수될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로마가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피의 증거 위에 세워졌고, 콜롯세움이나 전차 경기장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되었지만, 현대에, 우리가 좀 더 쉽게 인지할 수 있는 시기에 순교를 하신 분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신앙 안에서 살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우리 수도원 출판사에서 나온 [베르골료 리스트]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아르헨티나의 예수회 관구장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추기경 시절, 소위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시절에 독재에 협력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내셨는지 그 책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발각되면 자신도 온전하지 못할 그러한 순간에, 독재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남몰래 구해 내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사는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 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매년 2월 3일이 되면, 아빠스의 축일이라고 형제들이 멀리에서 오고, 봉헌회 여러분, 신자 여러분들과 함께 미사를 거행하고 축하를 받는 것이 너무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몇날 며칠을 살았나 생각해 보니, 오늘이 16802일째 더라구요! 태어나서 이틀 만에 세례를 받았으니까, 하느님의 자녀로 만6천8백일을 산 셈입니다. 고향에서 산 것 보다 타향에서 산 날이 훨씬 많아진지는 벌써 오래 전에 지났고, 수도자로 살기 시작한지가 오늘로 8770일째이니까, 이제 수도자가 아닌 삶을 산 날들 보다 수도자로써 산 날이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빠스로 선출된지는 오늘로 1003째가 됩니다. 지나온 시간들이 다 소중하게 다시금 떠오릅니다.

“신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고, 우리는 그렇게 영 이별을 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나고, 몇 주일, 몇 달,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그러는 새에 내게 있어 고향은 타향이 되었고, 타향이 고향이 되었다.”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입니다. 92년에 수도원에 입회하고 신학교 1학년 때 읽었던 글이었는데 오늘 아침 내 머리 속에 다시금 떠오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매년 이 날에 특별하게 축하를 받는 것이 송구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날짜라도 셀 수 있었던 때가 좋았어!! 라는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요. 형제 여러분들과 신자 여러분들의 기도를 계속 부탁드리며, 우리가 다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되어 기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이 미사 중에 하느님께 은혜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