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탄 대축일 밤미사(다해)

╋ 루카 2,1-14

오늘 수도원 저녁 식사 때 미역국이 나왔습니다. 예수님 탄생일이라서 주방 수사님이 특별히 미역국을 올린 것 같습니다. 저녁기도 마치고 복도를 걸으면서 미역국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인지 오늘 미역국은 더 맛이 좋았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으시고 미역국도 한 그릇 못 얻어 드셨을 듯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에서 산모가 미역국을 먹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기를 낳았으면 뭔가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했을 텐데, 성모님께서는 호적 조사를 하러 가는 길에 타지에서 갑작스런 출산을 하게 된 것이라 아무런 특별 대접도 없이 몸을 풀었을 것입니다. 아기를 낳는 것을 몸을 푼다고도 하더군요! 여관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가축들이 머무르는 곳에서 하루 밤을 지내야 했고, 아기를 낳아서는 포대기에 싸서 짐승들이 먹이를 먹는 구유에 눕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지상에서의 삶은 그 첫 순간부터 특별했습니다. 특별히 낮은 모습, 가난한 모습이었습니다.

이틀 전에 서울에서 보고 온 ‘흥남철수 작전’에 관한 전시회가 생각납니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한국 전쟁 중에, 12월 14일 부터 24일까지 200여척의 배를 동원하여 흥남부두에 집결한 근 20만 명에 가까운 미군과 국군, 피난민들을 후방으로 실어 날랐던 작전이었습니다. 화물선 한 척에 화물칸과 갑판에 피난민 만 사천 명이 빽빽하게 타고 있었는데, 앉을 자리조차 없었고, 대소변을 그 배 안에서 다 해결해야 했다고 합니다. 한 겨울이라 밖의 기온은 영하 30도였고, 그런 와중에도 배 안에서 다섯 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탯줄을 자르고 피를 씻겨 줄 물이 없어서 엔진의 냉각수를 뽑아내서 이것으로 아기들을 씻겨주었다고 합니다. 미국 선원들은 그 아이들의 별명을 김치1, 김치2, 김치3,,, 김치5로 정해서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치5씨는 갓 태어나자마자 도착한 거제도에서 아직도 살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기막힌 탄생 이야기가 우리가 구세주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첫 지상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세주, 메시아,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루카 복음 2장 1절의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14년까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통치하였고, 황제 등극 후에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숭배 드려야 할 분’ 혹은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그리스 말로는 세바스토스 sebastòs)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황제의 명령이 통하는 범위가 온 세상이라고 부를 만큼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통치한 시기는 ‘로마의 평화’라고 불렸고, 200년이 넘도록 이런 태평성대가 이어졌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로마에서 그를 신으로 선포하였고, 로마인들로 부터 숭배를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모습은 이런 황제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그 탄생을 축하하기 위하여 온 사람들은 들에 살면서 밤에도 깨어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포대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을 생각할 때 끊임없이 묵상해야 할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아야 할 때 항상 머물러야 할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께서는 화려하고, 권력을 가지고, 힘을 가진 분이 아니라 어느 가난한 부부의, 아직 정식 혼례도 치르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화려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누추한 곳이 그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에 대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경탄할 그런 모습이 아니라, 누추하고, 가난하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있고, 안전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부터 진리의 참된 빛이 비치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 길이 열리는 첫 자리가 됩니다.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도 성읍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읍 밖 들에서 남들이 편히 자고 있을 시간에 깨어서 양떼를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잠을 자더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즉시 대비할 수 있는 자세로 잠을 청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예전에는 수도자들이 서너 시에 일어나서 밤기도를 바치곤 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던 목자들처럼 하느님의 신비가 열리는 자리에 위치해야 하는 사람들이 수도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권력과 명예, 부유함이 하느님을 만나는 지름길이 아니라, 가난과 겸손, 단순함, 변두리의 모습, 깨어있는 삶이 하느님과 만나는 가장 가까운 길임을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늘 일깨워줍니다. 하느님이 하신 큰일에 대해 찬미하고, 순종하는 이들 곁에 ‘하늘’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목자들 곁에 주님의 천사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그 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 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고, 그리스어말이나 라틴어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 평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 hominibus bonae voluntatis’, 이탈리아어 성서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평화 agli uomini che egli ama’, 독일어 번역에서는 ‘그분 은총의 사람들 Menschen seiner Gnade 에게 평화’라고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힌트가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말씀을 우리는 성서 어디에서 만납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그 분 위로 내려오시면서 하늘에서 들리던 소리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그리고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항상 계시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갈 때 그 평화가 우리와 함께 머무를 것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극심한 갈등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더욱더 심해지고, 인간의 권리나 품위는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온갖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어도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대가 필요한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세상의 모든 소음 속에서도 베들레헴의 그 마구간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께로 우리 눈을 고정시키도록 합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참된 희망과 평화를 주는 기운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들었던 레오 대교황의 강론에서처럼, 당신이 만일 성인이라도 기뻐하십시오. 당신이 만일 죄인이라도 기뻐하십시오. 당신이 이교도라도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구세주께서 태어나심으로 우리는 월계관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고, 우리가 구세주의 용서를 받게 되었고, 우리가 당신 생명에로 불리워졌기 때문입니다. 구세주께서 사람이 되신 이 밤, 다 함께 이 기쁨을 나누며, 그 평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