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요한 9,1-41)

개인적으로 저는 예수님이 일으킨 신기한 기적 사건보다는 단순 명쾌한 말씀들을 더 좋아합니다. 복음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솔직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자연과학으로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그런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리 우리의 신앙이 신비와 초월을 지향하고 있다지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는 설명될 수는 없는지? 특별히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는 한층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주 복음에 나올 죽었던 나자로를 살리신 기적보다는 태생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기적이 약간 더 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믿어버리면 가장 쉽습니다. 하지만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른 다음 물로 씼었더니 잃었던 시력이 되살아 나더라 라는 말을 안과 전문의에게 한다면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요? 그렇다고 제가 오늘 강론에서 예수님의 침이 가지고 있는 약리적 효능이나 진흙을 이용한 획기적인 안과 치료법 혹은 실로암 연못 물의 성분을 분석하여 예수님의 기적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가 가지고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이런 상징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는, 지난 주 복음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그리고 다음 주 복음인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와 더불어 고대 교회의 세례준비 예식과 관련되어 있는 본문들입니다. 5-6세기부터 사순 시기는 부활대축일 밤에 베풀어지던 세례성사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입교 지원자는 우선 개인적으로 교리교사에게 약 3년동안 교리를 배웠습니다. 지원자는 상당한 교리지식을 습득한 후 교회에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알렸습니다. 그러면 예비자로 등록되어 교회에서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지도 받았습니다. 부활 대축일 3주전부터 예비자들은 매일 미사에 참석하여 주교나 사제의 강론을 들으며 세례를 받을 마지막 준비를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죄, 통회, 보속, 단식 같은 사순시기와 관련된 주제들이 아니라 세례성사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내용들로 구성된 독서가 낭독되었습니다. 강론자들은 사순 제3주일에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한 4,5-42), 사순 제4주일에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요한 9,1-41), 사순 제5주일에는 라자로의 소생(요한 11,1-45)에 대한 복음을 통하여 예비자들에게 세례성사의 본뜻을 새겨주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이 세 가지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를 짚어줍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활력을 주고 생기를 북돋워 주는 것은 끊임없이 샘솟는 생명수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갖춰야할 새로운 안목과 시각에 대하여 말해 주고,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통하여 인간이 지닌 최대의 한계이자 약점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는 우리가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 눈이 멀어 있었음을 은유적으로 알려줍니다. 여기서 눈은 육체의 한 감각기관인 육안(肉眼)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오감을 사용하여 사물과 상황을 인식하고 식별합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이 다섯 가지 감각 중에 인간의 인식과 식별과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시각이라고 합니다. 같은 대상을 바라보지만 사람마다 각기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육안은 표면적인 상황만을 인식할 뿐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숨어 있는 의미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실로암 못에서 시각을 되찾은 소경은 육안이 열렸을 뿐더러 영안도 열렸습니다. 기적을 통해 그 소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의 깨달음은 확고하고 명징합니다.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당당히 자신이 깨달은 바를 밝힙니다.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소경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바리사이에게 그를 데려갔을 때는 ‘예언자’가 그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리사이가 다시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눈먼 거지에서 확고한 신념을 소유한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난 일은 기적이라고 밖에 다른 말로 표현한 길이 없습니다.

눈먼 소경이 예수님을 증언하는 과정은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이고 깨우쳐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일뿐입니다. 보인다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이 멀었다는 말은 어디에 집착하고 있다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도 많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하느님의 영광을 찾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죄로 옭아매어 죽음으로 몰아갈 궁리만 했습니다. 율법과 죄에 집착한 나머지 바리사이들은 문자로 된 규정 너머에 있는 빛과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소경조차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건만, 예수님의 숱한 기적을 수사관이 수사하듯 샅샅이 살펴보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죄인으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차리리 맹인이라면 죄가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본다고들 말하고 있으니 당신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례성사를 받은 우리들에게 똑 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시각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린 지혜의 영, 분별의 영을 통하여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현실을 왜곡하고 세상을 기만하는 세력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그들은 우리의 관심을 세속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번영에 매어두어 세상을 점점 악의 구렁텅이로 만들어 갑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이 이런 우리의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머지않아 다가올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며 우리의 신앙감각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하느님을 느끼고 있는지? 우리가 제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 우리가 제대로 이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가 제대로 삶의 묘미를 맛보고 있는지? 오감을 활짝 열어 우리가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답답한 세상에 눈을 감지 마시고, 눈을 크게 뜨시고 세상을 꼼꼼히 살펴보시라고 당부 드립니다. 육안으로 보면 우울하고 절망적인 세상, 사막 같이 황량하기만 한 현실이지만, 그 어딘가에 숨어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영안이 열린다면 기쁨이 늘 우리와 함께 머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