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김종필 폴리카르포 수사신부

오늘은 계사년(癸巳年)의 설입니다. 설은 우리 민족의 큰 명절입니다. 다시 하늘을 우러러보고 바다를 바라다보듯이 새롭게 삶을 꿈꾸는 날입니다. 깊은 산의 품에 들고 높은 뫼의 봉우리에 오르듯이 새롭게 존재의 경작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의 첫날인 설에는 예로부터 삼가 조신(操身)하고 예(禮)를 다하게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미사 전례로 설을 맞이하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선택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이어지는 생명을 우리에게 선사하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을 그리워한 신앙의 우리 부모님들과 우리 공동체의 선배님들의 은덕에 감사하고 동시에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미사 전례 중에 기원합니다.

먼저 우리 교회가 전하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을 둘러봅시다.

 제1독서인 민수기(6,22-27)의 말씀 중에서는 사제에게 내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 제2독서인 야고보서(4,13-15)의 말씀은 세속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는 강력한 경고로 ‘한 줄기 연기’같은 ‘우리의 생명’에 대해 깨닫게 합니다. 인간은 자기 목숨의 주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14절) 이는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렛 1,2)라고 한 코헬렛의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어서 신앙인의 마음가짐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15절)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12,35-40)의 말씀 중에는 다음 구절들에 머물게 됩니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종말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이해하셨습니다. 도둑마냥 예기치 않은 순간에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니 항상 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 대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탈출기 12장에 나오는 파스카 음식을 먹을 때 삼가 조심하라고 일러주신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주님께서 언제 오시는지 모르는 우리가 꼭 해야 하는 것은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육과 영과 정신이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행복을 기원하는 우리의 큰 명절인 설은 새롭게 깨어나는 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큰 기대로 다시 깨어나야 하는 때입니다.

국문학자요 민속학자인 김열규 교수는 <삶의 意味를 묻는 당신에게>라는 책에 실린 ｢한 해가 덕(德)으로 열리기를 비는 마음｣이란 글에서 고려시대의 민요인 ‘동동(動動)’을 언급하고 풀이합니다. 그 내용을 직접･ 간접으로 인용하면서 설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동동(動動)’은 일 년 열두 달을 차례대로 읊은 ‘월령체(月令體)’ 곧 ‘달거리 노래’로 인간과 자연과 사랑을 노래합니다. ‘동동(動動)’의 첫 장은 이렇습니다.

“덕(德)일랑 곰배에 받잡고 / 복(福)일랑 임배에 받잡고 / 덕일랑 복일랑 나아라 오소이다.”

덕(德)과 복(福)이 연달아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소망과 축수입니다. 덕(德)은 ‘곧을 직(直)’ 아래에 마음 심(心)을 받친 글자입니다. 곧은 마음, 바른 심성이 바로 덕(德)입니다. 흔히 ‘큰 덕’이라 읽지만, 덕망(德望), 덕행(德行), 미덕(美德) 등의 낱말은 덕(德)의 원뜻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덕(德)이 뜻하는 바는 인간다움, 갖추어진 인격, 훌륭한 품성입니다. 그러기에 덕(德)을 복(福)과 함께 축수한 ‘동동(動動)’에는 도덕적 소망, 인격적 소원이 내비치는 것입니다.

“원컨대, 내가 인간답게 하소서./ 바라건대, 내가 사람이게 하소서./ 사람답기, 인간답기가/ 우리들의 소망이로소이다.” 라고 고려 옛적 사람들은 축수한 것입니다. 이렇듯이 덕(德) 없이는 복(福)이 없다는 믿음이 베어나는 민요로 ‘동동(動動)’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뱀띠의 해인 계사년(癸巳年)에 생각하는 뱀에 대한 성경적인 묘사는 이렇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간교한 뱀’이 인간에게 주어진 낙원의 복, 원복(原福, original blessing)을 잃게 합니다. 인간이 저지르게 된 원죄(原罪, original sin)는 뱀의 간교한 유혹에 걸려든 결과로 묘사됩니다(창세기 3,1-24 참조).

민수기 21장에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하는 불뱀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사죄하자 주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아 놓게 하고 쳐다보면 살게 하십니다(민수기 21,4-9 참조).

요한 복음 3장에는 예수님께서 니코대모와의 대화 중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모세의 구리뱀 사건에 비교됩니다. 여기서 ‘들어높이는 것’, ‘구원의 힘’,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 등으로 믿는 모든 이들이 얻을 ‘하느님의 나라’,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드러납니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의 사건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현현이며,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구원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사년(癸巳年) 새해 첫날에 뱀띠에 어려 있는 명암(明暗)을 성경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생각,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순종,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구도자로 거듭나는 계사년(癸巳年)이었으면 합니다.

계사년(癸巳年) 새해 첫날에 세배든, 윷놀이든, 미풍양속에 따른 무엇을 행하든지 우리네 언행에 도덕적 소망, 인격적 소원을 노래한 ‘동동(動動)’의 정신과 교훈을 간직하고 축수하는 우리들이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새해 첫날에 우리 교회가 기도와 미사 전례 중에 선사하는 은혜로 깨어났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과 평화의 길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길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밝히는 삶으로 거듭 깨어났으면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癸巳年 설날에 弼

매화(梅花) 피어나는 조춘(早春)의 두렁길에

화안(和顔) 마주하듯 풀꽃이 화답(和答)하네!

(보리,‘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