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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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9-14 18:34
왜관수도원 봉헌회 제3차 유럽수도원 성지순례기 (6) - 몬테까시노 수도원
 글쓴이 : 한선희 브리짓다
조회 : 7,892  

  5월25일 (맑음).

   오늘은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생활을 하시던 몬테까시노와 수비아꼬 수도원으로 가는 날입니다. 아침 8시 로마의 숙소를 출발하여 몬테까시노로 향하면서, 버스안에서 아침기도를 바쳤습니다. 로마 부근의 고속도로는 차량이 많아서 이 시간에 정체되므로, 운전기사는 샛길을 선택하였는데, 샛길도 공사 중인 곳이 많아서, 상당히 지체되었습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왜관수도원에 대하여 성 안셀모 수도원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 가(?)를 물어보았습니다. 최 빠꼬미오 신부는 “과거에는 왜관 수도원은 보통 정도의 수도원으로 인식되었지만, 작년 100주년 기념행사에 아빠스들이 다녀오신 이후, 인식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방학이 되면 성 안셀모 수도원을 닫으므로, 우리는 다른 수도원으로 이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수도원에서 ‘언제든지 와도 받아주겠다’고 할뿐만 아니라, 서로 ‘오라’고 할 정도이니, 걱정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작년 왜관수도원을 방문하셨던 분들이 100주념 기념식에서 가장 좋아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고 묻어보았습니다. “왜관 수도원의 발전과 봉헌회원의 친절에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국악 연주에 좋은 인상을 받으셨는데, 특히 솔렘수도원의 아빠스가 좋아하셨습니다. 작년 100주년 기념행사 이후, 왜관수도원에 대한 인식이 아주 좋아져서, 저희도 아주 좋습니다.” 


   까시노 시(市) 부근에 다가오니, 까시노 시(市)가 평야에 있고, 그 옆에 우뚝 솟아오른 산 위에 있는 몬테까시노 수도원(Abbazis di Montecassino)이 보였습니다. 까시노 시에 도착하자, 버스는 아주 가파르게 솟아 오른 산길위로 굽이굽이 굽어진 길을 헐떡이며 올라갔습니다. 까시노 시가 절벽아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문득 “동굴에 사시던 베네딕도 성인이 이렇게 높은 산위에 수도원을 세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두 신부님은 묵상하시고, 미사 중 강론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 분은 동굴에서 산마루로 옮겨 수도생활을 하신 것은 ①동굴에서 얻은 지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분은 적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산마루에 성을 쌓는 것과 같이 ②세속의 유혹이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산마루에서 수도생활을 하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가지 강론 모두 중요한 것으로, 우리 오딜리아 연합회의 모토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 를 생각하면, 한 분은 ‘밖으로의 선교’를, 다른 한분은 ‘안으로의 수도승’을 지적하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몬테까시노 수도원에 도착하자, 길게 세워진 건물과 입구가 보였습니다. 우리는 봉헌복을 입고 들어갔습니다. 입구위에는 “평화(PAX)” 라고 큰 글자로 새겨져 있었고, 어두운 동굴같은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갑자기 환하게 사방이 열린 입구회랑(Entrance Cloister)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베네딕도 성인이 오기 전에는 아폴로 신전이 있었던 곳인데, 베네딕도 성인은 이곳을 수사들의 공동기도 장소로 바꾸고, 투르의 주교, 성 마르티노에게 봉헌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 회랑 가운데에는 베네딕도 성인이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서서 기도하며 선종하시는 조상이 서 있었습니다. 

  이 회랑을 지나서 다음 회랑으로 가니, 르네상스의 스타일의 브라만테 회랑(Bramante Cloister)이 있는데 1595년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길이 40m, 폭 30m로서 바닥이 돌로 되어 있었고, 회랑 중앙에 팔각형의 우물이 있고, 코린트식 기둥 두개가 돌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이곳에서 마실 물을 얻었을 것이고, 잠시 ‘우물 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신 예수 그리스도(요한 4, 1)’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먼 서쪽에 폴란드 군인 전몰묘지가 보였습니다. 묘지에는 1944년 몬테까시노의 탈환에서 죽은 천명의 폴란드 전몰 군인이 잠들어 있고, 흰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우리 폴란드 군인은 우리 몸은 이태리에 주었지만, 우리의 심장은 폴란드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께 바친다” 고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몬테까시노 수도원 입구)                   (입구 위 새겨진 “평화 PAX”)

        

(선종하시는 베네딕도 성인)                             (브라만테 회랑과 우물)


    이 회랑의 대성당 쪽으로 왼편에는 베네딕도 성인, 오른편에는 스콜라스티까 성녀의 조상이 서 있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지팡이를 쥐고 있고, 발아래 새가 있는 조상으로, 1736년 만들어진 것이며, 지금까지 거의 손상되지 않았고, 아래에 글이 새겨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분 축복받으소서(Benedictus qui venit in nomine domini)” 스콜라스티까 성녀는 규칙서를 들고 있고 새가 그 위에 앉아 있는 조상으로,  2차대전때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후에 새로 모사된 것으로, 다음 글이 새겨 있었습니다. “오라 성령이여, 왕관을 받으소서(Veni columba mea, veni, coronaberis)”

   대성당(바실리카)를 향하여 계단을 오르면 회랑이 나타나는 데, “은인들의 회랑(Benefactors Cloister)” 이라고 합니다. 이 회랑은 1513년 르네상스 스타일로, 수도원에 기부하였던 교황과 왕의 조상이 있었고, 중앙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                       (대성당 가는 계단과 스콜라스티카 성녀)

    

(은인들의 회랑, 대성당 입구)                   (대성당 안내*)

(* 9:00, 12:00 미사, 10:30 그레고리오 미사, 4:00 저녁기도)

             

   이 회랑을 지나 대성당(바실리카 Basilica)로 들어갔습니다. 2009년 교황 베네딕도 16세가 오셨을 때 안내를 맡았던 안토니오 신부가 교황이 오셨을 때와 똑같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황과 같은 대우를 받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 수도원은 베네딕도 성인께서 529년에 오셔서 수도생활하시며, 베네딕도 규칙서를 완성하신 곳이며 베네딕도 성인과 스콜라스티까 성녀의 유해을 모신 곳입니다.

   2차대전 중에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다행히 독일군 장교가 연합군의 폭격을 미리 예견하고 설계도면과 많은 귀중한 유물들을 안전한 바티칸 ‘천사의 성당’ 으로 대피시킴으로서, 후일 그 도면대로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고, 복원비용은 모두 연합군이 지불하였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성경과 베네딕도 성인과 관련된 그림이 많이 있는데, 성당 중심에 있는 베네딕도 성인의 유해를 모신 곳은 전쟁 중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 폭탄이 그 부근에 떨어졌지만, 터지지 않아서, 유해가 무사했습니다.”

   대성당(바실리카)는 17세기와 18세기 양식으로 건축되고 장식되었고, 벽과 바닥은 대부분 과거의 대리석으로 재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쪽 면에 ‘영광의 베네딕도 성인과 제자들’이 프레스코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1979년 안지오니가 베네딕도 성인과 베네딕도 수도회의 이상(理想)을 40m2의 거대한 프레스코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중심에 있고, 규칙서에 의하여 거룩하게 살은 수사, 주교, 수녀가 둘레에 있는데, 이중 왼쪽에는 베네딕도 성인의 전기를 쓴 그레고리오 대교황, 중앙에는 1964년 대성당(바실리카)를 축성하고 베네딕도 성인을 유럽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한 교황 바오로 6세, 오른쪽에는 17세기 몬테까시노를 크게 발전시킨 성 빅터 3세, 즉 데사데리오 아빠스가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 그림 위에는 아브라함과 모세가 그려져 있는데,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생활의 아버지로서 아브라함과 비유되며, 규칙서를 작성한 것으로 십계명을 기록한 모세에 비유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대성당 안에는 성화와 화려한 장식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성당 제대)         (성 베네딕도/성녀 스콜라스티까 유해모신곳)

       

                   (안토니오 신부 설명)             (영광의 성 베네딕도와 규칙서 따른 제자들)


   우리는 설명을 듣고 나서, 지하성당으로 내려갔습니다. 지하성당은 모두 금빛 바탕으로 모자이크 되어 있었습니다.  중앙에는 성 베네딕도와 성녀 스콜라스티까 조상이 있는 경당이 있었고, 여기에서 우리는 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입구 계단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 베네딕도, 그리고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모자이크로 되어 있었고, 옆쪽으로 성 마오로 경당(cappella di s. Mauro)과 성 플라치도 경당(cappella di s. Placido)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천장 중심에는 비들기같은 성령이 그려져 있고, 기도하는 대천사가 모자이크가 그려져 있었는데, 천사의 모습이 거룩하고 평화스러워서, 잔상으로 오래남았습니다. 기둥사이에는 역대 아빠스의 문장과 설립기금을 기부한 왕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이중 오딜리아 연합회의 문장도 있었습니다.

   지하성당에서는 가장 많이 눈에 띄이는 것은 “평화(PAX)”라는 글자이었습니다. “평화”라는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많이 나오는 데, 예를들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까 2, 14)”,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 7)”,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까 24, 36, 요한 20, 20)” 등, 베네딕도 성인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평화를 강조하셨고, “이곳은 평화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하 성당에서 미사)                                    (지하성당 벽, 평화 PAX 글자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지하성당 천장, 기도하는 천사)


   미사가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공무원이 성당문을 닫았습니다. 몬테까시노 대성당뿐 아니라 이태리 내의 모든 중요한 성당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황 비오11세와 무솔리니가 맺은 라테란 조약으로 공무원이 관리하고 있고, 12시가 되면 문을 닫으므로 그전에 나와야 했습니다. 안토니오 신부는 입구쪽 지하경당과 베네딕도 성인이 넘어져서 팔을 짚었다는 깊숙이 파인 바위에 대한 설명도 해 주었습니다.


        

      (성 베네딕도 지하 경당)                 (베네딕도 성인이 팔로 짚었다는 바위)


   몬테까시노 수도원은 아주 화려한 수도원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유적을 간직한 수도원’ 이라기보다는 ‘성인의 영광을 표현한 기념관’ 이란 인상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 쓰신 규칙서로 미루어 볼 때, 소박하게 살았을 초기 수도원과 지금의 모습과는 상당한 시간적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성인이 살았던 시간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이 자리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몬테까시노의 역사를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장엄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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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딕도 성인은 529년 로마에서 130km 동남쪽 떨어진 까시노(Cassino) 시에서 서쪽 2km 떨어진 520m의 산 위에 수도원을 처음 세웠다. 그레고리오 대교황(Gregory the Great)의 베네딕도 전기에 의하면, 까시노 산 위에 있던 아폴로(Apollo) 신전의 유적에서 아폴로 상과 제단을 쓸어버리고, 그 신전을 투르의 성 마르띠노(Saint Martin)에게 봉헌하고, 세례자 요한(Saint John the Baptist)에게 봉헌하는 제단을 건설하였다. 그 당시 이교도를 몰아낼 때 이렇게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성 베네딕도는 여기에 정착한 후,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규칙서를 완성했고, 이 규칙서는 서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다. 약 543년 동(東) 고트왕 토칠라(Totila, king of the Ostrogoths)가 찾아와서 여기서 만났다. 그리고 베네딕도 성인은 여기서 선종했다. 그 후 몬테까시노는 미래를 위한 모델이 되었지만, 이 위치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해서, 항상 목표가 되었다. 여러 번 약탈되었고, 파괴되었다.

   584년 보니투스(Bonitus) 아빠스 당시, 롬바르드(Lombards)족이 쳐들어와서 약탈하였다. 살아남은 수사들은 로마로 피신해서 100년이상 로마에서 살았다. 베네딕도의 성인의 시신은 지금의 프랑스 오를레앙 부근의 흘레우리(Fleury, 현재 Saint Benoit sur Loire)로 이전되었다(1차 파괴).

   718년 페트로낙스(Petronax) 아빠스 시대에 들어와서 몬테까시노는 재건설되었다. 그리고 744년 베네벤토 지역의 지설프 2세(Gisulf II of Benevento)는 “성 베네딕도 영지”라는 수도원이 관리하는 영지부속(附屬領地)를 주었다. 이제 수도원은 베네벤토 지역의 주요 롬바르드 지역과 나포리, 가레타, 아말피 같은 해안도시(Naples, Gaeta, and Amalfi)의 중간에 있는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되었다.

   850년경 몬테까시노를 포함한 중남부 이테리는 정치적으로 아주 불안해졌다. 아랍 사라센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바사시오 아빠스(837-856)는 사라센의 위협에 대처하려고 노력하였다. 황제 로타리오 1세에게 간청해서 몬테까시노를 보강시키고, 방어를 위하여 산 아래에 “에우로지멘노폴리(Eulogimenopoli)” 라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는 후일 성 젤마노(St. Germano)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863년 까시노(Cassino)로 바뀌어졌다. 883년 9월4일 사라센은 강을 건너 몬테까시노를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베르타리오(Bertario) 아빠스를 살해하였다. 살아남은 수사들은  성 살바토레(St. Salvatore) 수도원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몬테까시노의 아빠스가 반격하여 아랍인들은 철수하였지만, 공동체는 많은 해가 지난 후에서야 돌아오게 되었다(2차 파괴).

   11세기에 들어와서, 노르만(Normans) 인들이 등장하였다. 교황 리온 9세는 노르만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다음 교황 니콜 2세는 노르만인들과 외교적으로 협상하고 싶어했는데, 이때 몬테까시노의 데시데리오(Desiderio, 1058-1087) 아빠스가 이 화해를 지원하였다. 그 결과 몬테까시노는 로마교회의 지지와 후원을 얻게 되어, 영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데시데리오가 아빠스로 선출될 때, 오래되고 낡은 수도원이었지만, 새 아빠스는 기숙사와 성당을 완전히 새로 지었다. 새 성당은 방 2개와 기둥 10개, 회중석 한 개, 복도 두개, 그리고 바닥은 화려한 모자이크로 하였다. 은으로 글자를 써넣은 세 개의 청동문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서 만들어 왔다. 이중 가운데 것은 지금도 볼 수 있다. 몬테까시노는 영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심이 되었고, 서방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이 되었다. 교황 알렉산델 2세는 1071년 대성당(바실리카)를 축성하였다.

   장엄함으로 빛나는 이 예술적 수도원은 세상의 눈을 집중하게 하였고, 세계로 그 영향이 펴져나갔다. 이때에는 수사가 200명이 넘었다. 그 당시 문서필사에 대한 열의도 높았는데, 많은 종교서적을 필사했고, 오늘날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이때 아름다운 베네벤탄 서체( Beneventan script)도 생겼다. 자연히 학문의 중심이 되었고, 학자도 많이 배출되었다. 이중에는 시인이었다가 살레르노의 대주교가 된 알화노가 있고, 중세역사를 쓴 역사가 아마토(Amato)도 있다. 또 콘스탄티노 아프리카노 (Costantino Africano)는 몬테까시노에서 아랍의 의학과 천문학을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과학적인 의학사고방식으로 이끌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살레르노 의학학교가 생겼다. 그러나 데시데리오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과 장식물은 모두 파괴되어 없어졌다. 단지 개 그림 두 조각만 현재 몬테까시노 박물관에 남아있다.

   1085년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선종하자, 데시데리오 아빠스가 교황 빅터 3세(Victor III)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즉위하고 수개월 후, 1097년 9월16일 몬테까시노에서 선종하였다. 오데리시오(Oderisio I, 1087-1105)가 데시데리오 아빠스의 사업을 계승하였다.

   오데리시오 아빠스가 선종하고, 12세기에 들어오자, 수도원은 교황-지지당과 노르만-지지당 사이에서 로마교회와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 11세기 중반이후 노르만 왕은 수도원의 내정에 간섭하며, 아빠스 선거권에도 간섭하였다.

   이 시기에 어린 아퀴노(Aquino)의 토마스가 몬테까시노에 왔다. 토마스는 부친 란돌프 백작(Landulf)과 모친 테오도라(Theodora) 사이에서 1225년 태어났다. 부친의 형제 시니발디는 그 당시 몬테까시노의 아빠스이었다. 그 집안에서는 토마스가 자기 영지 안에 있는 수도원의 아빠스가 되기를 희망한 것 같다. 그래서 5살 때 몬테까시노에서 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1239년 후레데릭 2세의 군대가 침입했을 때, 홀연히 몬테까시노를 떠났다. 나폴리의 후레데릭 학교로 가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적 철학을 공부했는데, 여기서 도미니꼬 수도회의 성 쥬리앙의 요한(John of St. Julian)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후일 교회박사(Doctor Angelicus, Doctor Communis, Doctor Universalis),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로서, 성인(聖人) 품에 오른다.    

   13세기 말부터 몬테까시노는 독립권이 없이 보호감독에 놓이는데, 1233년 교황 요한 22세가 아비뇽에서 교황칙서를 발표할 때까지 46년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몬테까시노 아빠스는 수도원에서 선출되지도 않았고, 의견도 제출할 수 없었다. 

   1349년 9월9일 큰 지진이 강타해서, 수도원을 폐허더미로 만들었다. 빛나던 데시데리오에 의하여 건설된 대성당(바실리카)과 대부분 수도원 건물은 파괴되었다(3차 파괴). 8년이 지나도록 재건되지 않았다. 1357년 교황 인노센쪼 6세 (Innocenzo VI)는 빈센쪼(Vincenzo al Volturno)를 주교와 몬테까시노 아빠스로 임명했다. 그는 열심히 재건하여 성당을 건설하고, 기숙사와 식당을 지었다. 그리고 이 사업은 후임 오르시니(Angelo Orsini, 1362-1365)가 계속하였다. 오르시니가 죽은 후에는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이 일을 계속하고 완성시켰다. 우르바노 5세는 몬테까시오의 불상한 처지를 걱정해서 보호감독제도를 폐지하고 스스로 “몬테까시노의 아빠스” 라는 직함을 가졌다. 그리고 1369년까지 모든 베네딕도 수도회가 이 수도원의 재건을 위해 2년마다 일정한 금액을 기부하도록 했고, 다른 수도원의 수사를 몬테까시노에 초대했다.

   1343부터 세속왕권으로 인하여 몬테까시노는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는데, 1463년 교황은 몬테까시노를 로마교회에 전적으로 부속시켰다. 1452부터 1504년까지 수도원의 인사행정은 추천제도로 바뀌었고 수도회 외부사람인 추천권자에 의하여 아빠스가 선출되었다. 추천권을 가진 사람은 추기경, 교황 등이었는데, 메디치 가(家)의 지오반니(Giovanni de Medici, 1486-1504)가 통치하는 중,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몬테까시노를 성 지우스티나 연합회(Congregation of S. Giustina)에 가입시켰다. 이 연합회는 오늘날 까시노(Cassinese Congregation) 연합회가 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몬테까시노 역시 이 소용돌이 포함되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수도원을 침입했고, 은제품, 보석, 성스런 옷 은 모두 없어졌고, 책과 사본은 발아래 흩어졌고, 파괴되었다. 1806년, 나폴리 왕국의 봉건제도가 폐지되었고, 그 결과 수도원은 모든 부속토지를 상실했고, 아빠스는 재량권을 박탈당했다. 그 후 종교질서법(Law of Dissolution of Religious Orders)이 발효되어서, 1808년 초상화는 모두 손상되었다. 훼르난드 4세(Ferdinand IV)가 나폴리의 왕이 되면서, 몬테까시노 아빠스는 영적 재량권만  가질 수 있었다.

   1868년 이태리 통일 후, 몬테까시노의 재산은 ‘구원왕(the King of Savoy)’에게 넘어갔다. 수도원은 국가기념물로 선언되었고, 아빠스는 교구 주교(diocesan Ordina)로서, 수도원 공동체의 총회기능을 갖게 되었다. 1880년 세계 베네딕도회 연합회의 모든 아빠스들이 몬테까시노에 모여서 베네딕도 성인의 14세기를 경축했다.

   1차 세계대전은 수도원의 평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2차대전 중 1943년, 시실리에 있는 연합군은 로마로 진격하게 되었다. 이에 맞서 독일군은 “구스타브 라인(Gustav line)” 이란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여기에 까시노가 포함되었다. 이것이 수도원을 곤경에 빠뜨렸다. 연합군은 까시노에서 저지당했고, 몬테까시노는 작전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943년 10월, 전투가 일어나기 전, 독일군의 벡커 대위(Captain Maximilian Becker, 천주교)와 쉬레겔 중위(Colonel Julius Schlegel, 개신교)는 몬테까시노의 보물을 바티칸과 바티칸 소유의 성 안젤로 성(城)으로 옮길 것을 제안하였다. 교회당국과 그들의 지휘관의 승인을 얻어서 군대 트럭으로 이동시켰다. 병사 중에서 숙련된 목수를 찾아내서, 매일 보급식량과 담배 20개를 더 주고, 많은 책과 고문서를 나무박스로 포장하였다. 교황문서 8백개, 구 도서관에서 2만5백권, 신 도서관에서 6만권, 양피지의 고문서(인큐나볼라) 2백개, 10만개의 프린트와 수집된 작품들 포장하였다. 각 트럭마다 수사들이 한명씩 타고 운반했는데, 100번도 넘게 운송하다보니, 몬테까시노의 수사는 거의 다 없어질 지경이 되었다. 1943년 11월 1일 운송작업이 끝났고, 이 3주 동안 다행히 전투는 없었다. 1944년 2월15일, 9시45분부터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고, 3시45분까지 폭탄 공격은 계속되었다.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고, 그나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빠스와 수사 몇 명이 살아남았다(4차 파괴). 수사들은 로마로 피신했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44년 5월11일부터 폴란드군이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5월17일 독일군이 철수하고, 몬테까시노는 5월18일 탈환되었다. 1944년 7월, 수사들은 몬테까시노로 돌아왔다.

   몬테까시노 전투는 치열하여 사상자가 많았다. 연합군은 사상자 10만5천명으로 추산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폴란드가 먼저 몬테까시노가 보이는 곳에 묘지를 잡았다. 영국, 뉴질랜드, 카나다, 인도, 남아프리카는 공동묘지로서, 프랑스, 이태리, 미국, 독일은 각각 까시노 외곽에 묘지를 만들었다. 독일군 사상자는 집계되지 않았으나 까시노 묘지에 2만명이상이 잠들어 있다.

  1945년 2월16일 이태리 노동부 장관(Minister of Public Labours)은 몬테까시노의 재건을 약속했다. 1945년 12월8일 몬테까시노에 새 아빠스가 도착했고, 수도원의 재건은 이태리 재건의 상징이 되었다. 베네딕도 성인의 묘와 성당은 프레스코로 그려졌고, 대성당(바실리까)의 양측 문은 피에트로 카토니까가 조각하였다. 이것은 모두 이테리 대통령 에이나우디가 기부한 것이다. 회랑입구의 청동판은 셀바가 만들었는데 이것은 독일의 대학학장 콘라드 아데나우어의 선물이다. 그는 은으로 만든 제단앞 장식과 여러가지 작품도 기부했다. 대성당의 둥근천장 돔(dome)과 아치 사이의 장식은 피에트로 아미호니가 프레스코로 장식했다. 성당의 옆쪽은 미국인 벤 롱과 이태리인 단테 리치, 그리고 실베스트로 리스토레시가 채색하였고, 성가대 천정은 로마노 스테파넬리가 프레스코로 장식하였다.

   1964년 10월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새로 건설된 이 대성당(바실리카)를 축성하였고, 베네딕도 성인을 유럽의 주보성인(St. Benedict the principle Patron Saint of Europe)으로 선포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 국회에서 몬테까시노를 폭격한 것에 관하여 청문회가 있었다. 청문회 기록에는 “독일 군대는 없고, 단지 적은 헌병들이 수도원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고(1961), 미군 기록에는 “수도원은 실제로 독일군대에 점령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969). 그 당시 수도원에는 전쟁으로 피난 온 여성과 어린이들만이 있었던 것이었다.

   쉬레겔 중위는 약탈자로 의심받아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7개월간 감금되었다. 그러나 몬테까시노 수사의 유리한 증언으로 자유를 찾았다 그레고리오 디아마레 아빠스는 독일의 쉬레겔과 벡커, 폰 콘라드 장군에게 몬테까시노 수사들의 목숨과 보물을 구출한 것에 대하여 라틴어로 된 감사장을 수여하였다.

   현재 몬테까시노는 많은 사람들과 교황,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자주 찾는 곳이며, 지난 2009년 5월 베네딕도 16세가 방문하였다. (Abbazia di Montecassino 및 Wikipeia 에서 발췌)


       

     (1944년 파괴된 수도원)                            (재건된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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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몬테까시노 수도원을 내려와서 ‘K-2’ 라는 이태리식당에서 빵과 스파게티, 소고기 요리,  포도주로 이태리식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포도주와 소고기 요리는 아주 맛이 있어서, 기억에 남는 식당이었습니다. 점심식사 후 수비아꼬(Subiaco)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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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anas 10-09-16 02:57
 
“오라 성령이여, 왕관을 받으소서(Veni columba mea, veni, coronaberis)”
->"오세요, 나의 비둘기여, 화관을 쓰고 오세요"

- 비둘기 : 스콜라스티카. not 성령...
(I can not use HANGUL... ctrl+c,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