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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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4-02 08:46
박석희 주교님의 피정 노트 - 기적에 대하여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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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지금은 우리가 멀리 있을지라도 - 김광민 - 보내지 못한 편지.mp3.MS (4.4M) [102] DATE : 2008-04-02 08:46:49

 

제7장 기적들

 

<큰 돌의 기적>

 

우리는무엇을 향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이 아니시면서도 어떤 일들을 하신다. 산에서 굴러 떨어지던 돌이 갑지기 공중에서 멈추었고 밑에 소년을 구해냈는데고 그 돌은 계속 공중에 있다고 하자. 그리고 여러 면으로 오랫동안 조사했어도 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았다. 기적이란 무죄한 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악한 자들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 하느님이 개입할 때에 얻어지는 것이다. 비록 하느님은 많은 경우 비밀스런 방식으로 행동하시지만 위의 예에서는 하느님 행위가 분명하게 그러난 경우이다.

 

이 사건이 기적으로 판명된 이유는 어린이 위에 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어떤 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그 돌이 그 소년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한 원인이 없다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기적이라고 정당하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돌이 떨어지지 않게 한 원인이 없다는 것과 하느님이라고 하는 어떤 원인이 있다는 것은 입증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자연적 행위자와 초자연적 행위자의 구별도 별 도움이 안된다. 자연적 행위자에 의한 것이 안라는 것은 과학자들이 다 조사하였다. 초자연적 행위자였다면 그 말자체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눈에 안보이 행위자가 했다는 것이 입증되었기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원인 발견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조사도 하지 않고 기적이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조사 후 원인이 밝혀지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만일에 아이의 바로 위에서 바위가 중단한 사건에 어떤 놀라운 힘이 발견되었다면 이 사건은 기적적적인 동시발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아이가 약간 비켜있었다고 해도 기적적인 동시발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행위자도 그 사건에 책임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건이 기적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이 그 사건과 연루되어 있기에 기적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그 사건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어떤 누군가가 했다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도 행하지 않을 때에 행하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아무것도 원인이 되지 않을 때에 원인이 되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내적원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자도 있을 것이다. 외적원인은 조사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내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우리는 감지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실제로 외부에서 우리를 주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외부에서 우리를 억압하거나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작용하시어 우리의 본 모습을 드러나게 하신다. 실제로는 하느님은 원인이 없을 때에 원인이 되는 것이다. 기적이 놀라운 것은 한 사건이 원인이 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적에 대해 감동스러운 것은 하느님이 그 사건의 원인으로 발견되었기에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위한 원인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놀라운 것이다.

 

무신론자와 그리스도 신자가 기적을 보는 차이는, 그리스도 신자는 무신론자가 갖지 못하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돌보신다는 표지를 확인하게 된다. 이 사건은 자기 신앙의 맥락 안에서 의의를 갖게 된다. 기적은 내가 믿는 것에 대한 증명은 아니지만 신앙의 삶의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믿는 자는 자기를 돌보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으로 본다. 그러나 무신론자에게는 믿음과 삶에 아무 영향이 없다. 믿는 자들은 믿지 않는 자들 보다 기적을 더 넓게 적용해 간다. 기적을 자기 삶의 어떤 상활 안에 둠으로써 넓게 해석하고, 넓게 이해해 나가면서 어떤 체계 안에 맞추어 간다. 무신론자들에게는 믿음의 삶의 체계가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놀라는 것이다.

 

만일 국제 회의 중에 기적사건이 일어났고 그 기적 사건에 볼 수 없는 행위자가 개입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그 볼 수 없는 행위자가 자기가 믿는 하느님이라고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각 나라 사람들은 자기의 신들이 했다고 의심없이 반응할 것이다. 각국의 많은 사람은 모두 각기 자기가 믿는 하느님과 자기 신앙의 맥락 안에 넣게 되고 그들의 체계 안에 맞추게 된다.

 

루르드의 기적 보고는 어떻게 선포되는가? 대부분의 조사는 병이 완쾌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원인들이 전혀 없는가에 관심을 둔다. 그 병이 완쾌된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고, 그 병의 완쾌를 위한 원인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적으로 선포된다.

 

 

<구조사건>

 

두 개의 사건이 우연한 일치를 동시발생하는 것이 기적적이라고 주장한다.

 

예) 탐험가인 시몬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자동차가 고장났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다가 나침반이 고장났다. 그는 사람 밖이 아닌 중심부로 깊이 들어갔다. 양식도 동이 났고 물통도 구멍이 나서 물이 다 새어 나갔다. 죽을 힘을 다해서 사막의 개울(wady) 구석에까지 도달했으나,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백만장자인 철수는 항상 목요일에 비행기로 지중해의 섬으로 휴가를 가곤했다. 그런데 그 주에는 사막으로 피크닉을 가기로 하였고, 목요일이 아닌 수요일에 가기로 하였다. 사막으로 비행 중에 어느 사막 와디에 내렸는데, 우연히 죽어가고 있는 시몬을 발견했다. 항상 건강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철수는 가기의 의료도구로 응급처치를 하고 시몬을 살렸다. 시몬은 신자로서 하느님께 자기를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이 사건을 기적으로 보았다.

 

이 사건의 기적인 것은 무엇인가 여기는 이상한 놀라운 사건도 없고 자연법을 거스러는 일도 없다. 다만 놀라운 것은 두 사건의 연결이다. 그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적인 동시 발생(a miraculous coincidence)이다.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이 서로 만나도록 조정하지 않았다. 두사람은 각자 서로 모르는 가운데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 스스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기적적인 동시 발생이라고 할만한 이유이다. 만약 보이지 않는 숨은 조정자가 이 두 사건을 연결지웠다는 것을 안다면 시몬은 이 사건이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이 기적인 것은 조정하지 않은 두 사건이 서로 일치해서 지극히 좋은 결과를 낸 것이다.

 

지독히 나쁜 상황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조정되었다면 처음부터 좋게 조정되었을 것이며, 시몬이 죽을 지경까지 이르지 않게 조정되었을 것이다. 일어난 일이 기적적이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조정하셨다고 말하고 싶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분(Somebody)이 그렇게 조정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도(Nobody) 조정하지 않았을 때에 조정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사건들을 조정하시는 것은 보통 말하는 사건들의 조정 종류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조정하시는 것은 도대체 조정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건들이 다르게 될 수가 없다. 아무도 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이 하신 것이다. 또 아무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종교인들은 각자 자기들의 신이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일을 추리해서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반응’으로 감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사건을 택동이가 조정한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하느님이 행동한 것과 택동이가 행동한 것은 다르다. 그 근본적인 차이는 시몬은 택동이가 한 일 때문에 택동이를 저주하는 반면 하느님께서는 일어난 일데 대해 감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경우에는 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한 사건(event)이 아니라 그것은 행위(deed) 즉, 하느님이 행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택동이의 경우에는 단순한 사건(event)을 그가 행한 행동(deed)과는 반대된다. 즉 하느님께는 한 일과 일어난 일이 일치되지만, 사람에게는 동일성이 없다. 이 차이 때문에 시몬은 택동이가 일이 일어나도록 조정한 행동 때문에 그를 저주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구출되도록 한 일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 행동과 하느님이 한 행동은 반대이다.

 

시몬이 하느님께서 자기를 구출해 주시기를 기도한 것은 자기가 구출되기를 기도한 것이고, 그의 감사는 단순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하나 감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몬이 구출된 것이,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어떤 분처럼 조정한 것이라고 할 때 그 사건은 우연적인 동시발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한 행동과 사람이 한 행동은 똑같이 보게 되면 사람에게 하는 원망처럼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 사건이 기적이 된 것은 볼 수 없는 행위자가 추론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행위자도 그 사건에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행위자가 부재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했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어떤 행위자의 이름은 아니다.

 

여기서 생길 수 있는 유혹은 ‘누구의 행위든 행위는 행위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나 하느님의 행위는 비슷하다라고 보는 것이다. 하느님이 한 행동에는 보통 어떤 행위자가 한 일처럼 한 결과는 있지만 그 일을 한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가 보통 어떤 행위자가 한 그 일에, 그 일을 한 자는 아무도 없다. 행위자가 부재하는 것이다.

 

이 행위자의 부재는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추리하여 그 구멍을 자꾸 채우려 한다. 하느님이 하셨다는 결론이 나면 감사하다가도 ‘하느님은 이렇게 골통을 먹이시는 분이신가’ 하고 또 의심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한 행동과 하느님이 한 행동을 동일시 했기 때문이다. 그 구멍을 채우지 않으면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고 원래의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신비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왜 그 구멍을 자꾸 채우려 하는가? 우리는 그 구멍을 내가 가장 친숙한 말이나 개념으로 채우거나 어떤 행위자를 상정하거나 해서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그 기적적인 사건은 일상적인 사건으로 바뀌어 버리게 된다. 사건의 일치에서 보았듯이 기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려고 친숙한 말이나 개념으로 설명하면 결국은 원래의 것과 다른 상활응ㄹ 만들어 버리게 된다.

 

하느님께서 하신 것을 왜 내가 이해하기 힘든가 하면 인간의 방식으로, 틀린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내게 친숙한 상황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구멍이 난 그대로 놔 두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빈자리는 빈자리로 그대로 두어야 한다. 내 감각 세계를 초월해서 이해하려 하지 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느님을 더 잘 이해한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활동은 볼 수 있고 보여질 수 있고 말이나 글로 기술되어 질 수 있는 것에서만 보여지고, 보여지는 것을 넘어가거나 그 이면으로 들어가고자 해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이해될 수 없는 분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이해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 말은 하느님에 대한 지성적 수수께끼를 해결하는데 적용하지 말라.

 

하느님에 관한 것들은 다른 양식으로 이해되어야 된다. 하느님에 관한 한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도 지성적으로 다른 사물을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이다. 빈자리는 빈자리대로 두어라. 사물이나 사람을 대할 때에도 빈자리는 그대로 두어라. 왜냐하면 사람들도 다 하느님이 감싸고 계시기 때문에 빈자리가 틀림없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