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빈 자리

Timothy Radcliffe, O.P

조성옥 에노스 옮김

베네딕도회 아빠스님들의 모임에 초대되어 이렇게 말씀드리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새천년기를 맞은 수도원의 역할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주제를 논하기에 제 자신이 아주 적합한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기에 처음엔 과연 이 초대를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성 베네딕도와 그의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승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수락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오래전 약 십년간 워스(Worth)와 다운사이드(Downside) 수도원에서 베네딕도회 수도승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은 제 생애의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저를 가르치신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보여주신 인간미는 지금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방법은 매우 영국적인 것이었지만, 그분들은 제가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께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제 수도성소는 베네딕도회 수도승이셨던 저의 종조부님, 돔 죤 래인 폭스(Dom John Lane Fox)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의 샘솟는 활기와 열정은 참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존경받는 베네딕도회 수도자이며 제 친구인 베이실 흄(Basil Hume) 추기경에 대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순례의 여정에 베네딕도 수도원들은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쉬면서 저는 여행길을 계속할 새 힘을 받곤 했습니다. 북크훼스트(Buckfast) 수도원에서 부제품을 준비하는 피정을, 사제서품 전에는 노르만디(Normandy)의 벡(Bec) 수도원에서 대품피정을 하였습니다. 라 삐에르 퀴 빌(La Pierre qui vire)와 아인지델른(Einsiedeln) 수도원에서 휴가를 보냈고, 헝가리의 판논할마(Pannonhalma) 수도원에서는 부활절을 지냈습니다. 그 외에도 수비아코(Subiaco),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몬테 올리베또Monte Oliveto) 등 많은 베네딕도 수도원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수도원을 가든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왜 수도원을 찾았을까요? 어떤 이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듯 수도승을 한 번 구경하기 위해 들른 지나가던 여행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수도승들에게 먹을 것을 던지지 말라” 따위의 경고문을 보게 될거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르지요. 또 어떤 이들은 수도원의 건축물이나 전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방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신비체험 같은 것을 기대하며 수도원을 찾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세속화를 걱정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그들 내면의 깊은 종교적 갈망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내곤 합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목마름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양의 종교나 뉴에이지, 그리고 이색적인 것과 밀교에서 이 목마름을 채우려고 합니다. 반면 수도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제도화된 종교와 교회에 대해서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이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수도원에서만큼은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고 초월적인 것의 흔적을 보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이런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수도원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찾아오는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손님들은 온갖 존경을 다해 영접될 것이며 수도승들은 반드시 그분들의 발을 씻어드리고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고 규칙서에 쓰여 있습니다. 저는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늘 그런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빅토르 담메르츠(Viktor Dammertz) 아빠스가 원장이었을 때 상트 오틸리엔(St. Otilien) 수도원을 방문한 것이 기억납니다. 당시 저는 초라한 행색의 빈털터리로 길을 가는 차를 세워 공짜로 얻어 타며 여행을 하고 있던 도미니코회 신학생이었습니다. 그 때 참으로 깔끔했던 독일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은 저를 자신들의 수도원 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고 이발도 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제 모양새는 상당히 그럴듯해졌었지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수도원에 마음이 끌릴까요? 이것에 대한 저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제가 하는 소리가 완전히 상식 밖이라고, 단지 한 도미니코 회원이 베네딕도회의 수도생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디 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수도원이 여러분이 하는 말이나 하고 있는 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수도승 생활의 가장 중심에 있는 텅 빈 자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는 그 공허한 빈 자리 때문에 하느님을 증거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베네딕도 규칙서는 여러분 삶의 중심에 어떤 빈 공간을, 그 안에 하느님이 머무르시고 그분의 존재가 감지될 수 있는 텅 빈 공간을 제시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장소에서 드러내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사막을 빠져나올 때 하느님은 케루빔의 날개 사이 당신 자비의 자리 위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영광이 머무는 자리는 텅 비어있는 공간입니다. 단지 손 한뼘 정도밖에 안될 작은 공간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거대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서 이백 미터도 채 안 떨어진 아벤띠노(Aventino 언덕)의 사비나 성당의 정문 위에는 유명한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려 대답 없는 하느님을 향해 절규하며 숨을 거둠으로써, 텅 빈 부재의 공간이 동시에 영광의 자리가 되는 것을 봅니다. 가장 지고한 영광의 자리는 시신마저 사라진 빈 무덤입니다.

저는 베네딕도 수도원들이 하느님의 영광이 비추어지는 장소이기를, 계속해서 신비를 위한 자리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무엇인가가 되려고 하지 않을 때, 특별한 그 무엇도 하려고 하지 않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천체과학자들은 새로운 혹성을 찾으려고 애써 왔습니다만 최근까지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규칙한 행성들의 궤도를 추적하여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수도원의 중심이 되는 볼 수 없는 별을 밝혀 주는 혹성들입니다.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여러분의 생활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신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진실로 당신은 숨어 계신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45. 13)

여러분 삶의 눈에 보이지 않는 중심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습 안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여러분 중심에 있는 빈 자리, 아무 것도 없는 그곳에서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 공허한 빈 자리를 하느님의 거처로 만드는 수도승 생활의 세 가지 양상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첫째, 수도승의 삶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둘째, 수도승의 삶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도승의 삶은 겸손을 사는 것입니다. 수도승 생활의 이 세 가지 양상은 우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안내합니다. 저는 이 빈 자리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례를 바칠 때라고 생각합니다. 수도승들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함께 모여 시간경을 노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으로 우리 안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