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마음

복자 라파엘 아르나이스 바론

장익 요한 주교 옮김

아우님, 그대의 길은 단순에 뜻을 두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밖으로는 단순 안으로는 사랑 뿐, 그 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신뢰의 정신과 하느님에게 바탕을 둔 자유로운 마음으로 걸어 나간다면 하느님께로 다다르는 참된 길은 순편하고도 단순한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면뿐 아니라, 트라피스트의 진정한 특징인 내적인 단순을 몸에 익힌 수도자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들은 사회에 있었을 때 꽤나 복잡한 인간들이었는데 -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지만 -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하략)” 하신 말씀의 참뜻을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길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세상에 죽을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침묵과 은둔 생활의 엄함 가운데에는 단순함 속에 담긴 행복을 알아보는 마음의 잔잔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십자가라는 오직 하나 뿐인 길을 통해 따라갑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단순함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얻는 사람의 마음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비추어 주십니다.

단순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구불구불한 길을 거쳐가야만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우리네 인간은 별의별 것을 다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혹 우리가 아무리 해도 덕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단순한 것을 젖혀놓은 채 복잡한 것을 하려 드는 우리의 습성 탓일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단순한 행동이 그 안에 담고 있는 위대함을 알아들을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잡한 것 안에서 위대함을 찾으려 하고 어려운 일 안에서 위대함을 구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런가는 잘 모르겠지만, 나 자신 전에는 애매하고 복잡하다고만 여기던 것이 사실은 의외로 간단하고 자연스럽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덕, 하느님, 내적 생활 등 (중략) 이런 모든 것을 살기란 어렵다고 여겼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뭐 덕을 쌓았다거나 하느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거나 내적 생활이 온통 환해졌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복잡함이나 뒤얽힘 없이 또 번잡한 철학이나 까다로운 방법을 쓸 것도 없이, 거기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느님께 다다르는 것은 바로 그 반대의 길로 통합니다. 극히 자연스럽게 단순한 마음에 의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행동은 아무런 곤란 없이 일으킬 수 있습니다. (중략) 정말로 어려운 것은 오히려 극도로 신비스러워짐으로써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다다르는 것은 앞서 말한 사랑의 길을 통해서이지 후자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덕을 놓고 말한다면 (중략) 그것은 아무래도 성인들의 몫이지 실천하기란 무척 어려운 것입니다. 그건 분명 그렇습니다. 하지만 덕을 닦기 위해서는 힘겨운 상황에 부딪칠 필요도 또는 고도의 공부에 몰입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그것을 원하는 것” 만으로도 족합니다. 때로는 단순한 의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왜 나는 아무리 해도 덕을 닦을 수가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단순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원을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온갖 것들은 오히려 우리의 원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무언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자신의 의지가, 마음 내키는 것, 쉽고 편한 것, 필요치 않은 것 등에 끌리도록 내버려두면서 때로는 욕망이 기우는 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분이 나에게, 성인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을 소상히 가르쳐만 주신다면,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것을 실천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곁에 계셔만 주신다면 그 어떤 일도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화의 길은 갈수록 더 단순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이란 무언가를 더 보태는 데에 있지 않고 도리어 줄여 나가는 가운데에 있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어떤 신묘한 무엇을 복잡화하는 데 있지 않고 갈수록 점점 더 단순해지는 데에 있습니다.

피조물 일체와 나 자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우리들은 유일한 사랑, 유일한 바람, 이 생명에 대한 유일한 열망, 그리고 다름 아닌 바로 하느님 자신인 저 참된 거룩함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나는 믿습니다.

(코이노니아 제23집 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