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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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07 16:42
박석희 주교님의 피정노트 - 기도<하느님께서 여기 계심에 대해>
 글쓴이 : Ans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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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기도

 

<하느님께 말씀드림과 하느님께서 여기 계심에 대하여>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과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기도란 하느님께 말하는 것, 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사람과의 대화는 다르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 아니라 실제로 대화의 상대가 없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 내가 하느님과 대화를 하고 있다면 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일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면 동시에 하느님께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대화할 수 있는 상대자들의 명단에 하느님을 함께 올릴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가끔 상대를 틀리게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말하고 있다면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느님께 말하는 것이 볼 수 있는 어떤 분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과 대화할 때는 감지할 수 있는 어떤 비평 기준이 없다.

 

하느님의 모상을 자꾸 만들어 놓으면 제대로 기도할 수 없다. ‘하느님과 대화하고 있다’고 할 때는 그 어떤 것도 하느님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기도할 때 하느님은 항상 현존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느님을 감지할 수는 없다. 하느님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서 하느님이 거기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즉, 하느님 현존을 입증해 보일 수 없음을 알게 되더라도 바보처럼 여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 현존에 대한 어떤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현존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항상 기도하는 거기에 계신다면 대화하시는 분으로 거기 계신다. 그분은 당신의 대화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이다. 어느 누구도 그 분이 주의를 기울이고 계시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그분은 항상 각각의 대화에 주의를 주고 계신다.

 

하느님의 얼굴은 항상 당신께로 향하고 있다. 아무리 수백만의 각기 다른 사람에게 향하고 계시더라도 그분은 항상 한 얼굴을 하고 계신다. 이것은 어떤 놀라운 발견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다른 기능의 언어이다.

 

마태오 복음 6장 5-6절에 하느님과의 대화에 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부분이 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는 내가 하느님과 대화한다는 의식도 없어야 한다. 제자들은 사사로이 기도하기 위해 외딴 곳으로 가기를 좋아했다. 내가 하느님 하고만 같이 있게 되면 나는 홀로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홀로 있고자 할 것이다. 기도에서 생각해 보면 하느님은 내가 어느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기도한다고 하느님을 갑자기 나타나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고 계신다. 그러면 나는 나 혼자 있을 수 있고, 그리고 내가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과 말을 하고 있으면서 하느님과 단독으로 있을 수 있다. 나는 실제로 혼자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하느님과 독대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철수와 독대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은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신다’라고 말할지라도 그래도 나는 홀로 있다. 내가 홀로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언어는 매우 유동적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문맥이 있을 수 있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

 

비록 어느 누구도 나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하느님 아버지는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그분을 버리고 가 버리더라도 그분은 버림받은 자로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으니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외롭게 반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홀로’라는 것은, 하느님이 거기 계신 것(현존하신다는 것)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모두가 나를 버리더라도 하느님은 함께 계신다고 반응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어떤 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가장 위험스런 순간에 표현되는 신뢰의 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나와는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항상 여기 계신다’ 이 문장은 기도의 맥락 안에서 사용된다. 그것은 나는 항상 기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하느님께 말씀드리면 하느님은 항상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그래서 나는 비록 홀로 있을 때도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내 말을 들어 줄 분이 아무도 없어도 기도할 수 있다.

 

‘하느님은 항상 여기 계신다’라는 문장을 다른 문맥 안에서 말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기도할 때에 하느님은 거기 현존하신다. 마치 어떤 사람이 어떤 사건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 거기에 참여하여 현존하듯, 하느님도 내 기도의 맥락 안에 현존하신다. 그러나 기도하기 전에도 거기 현존하고 계신다. 나는 홀로 있을 때에 기도할 수 있고, 하느님은 내가 홀로 있을 때에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내가 무엇을 할 때에(홀로 있을 때에, 기도할 때에) 그와 관련해서 있는 것처럼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 전에도 항상 여기 계신다. 그래서 나나 다른 이들이 내가 홀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때에도 나는 결코 실제로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경우도 있다. 혼자 있을 때 나는 기도할 수도 있고 사적인 일이나 때로는 부끄러운 일도 한다. 만일 다른 누군가가 그러한 일들을 본다면 내가 부끄러워질 그러한 일들도 한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하기 전에 나는 내가 홀로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도 잊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다시 기도하면 하느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일까? 나는 어떤 시간에 잊었던 것을 다시 기억하겠다고 정할 수는 없다. 내가 하느님 면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내가 잊어버렸던 어떤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준비할 수 있다. 기도할 때에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느님이 여기 계신다는 것을 잊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Context)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기도를 끝냈을 때 그것은 하느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즉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는 상황을 해제하는 것이다. 이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느님과 대화하는 방식이다.

 

내가 부끄러운 짓을 하려고 할 때에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내가 기억한다면 이것은 내가 하느님 기억을 일시적으로 않다가 다시 그 기억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치 어떤 분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거나 깨달았을 때와 같은 반응이 아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하면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이 대하여 부끄럽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행위에 대하여 후회하고, 내 행동에 대하여 나 스스로 부끄러운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하느님이 나를 보고 있다’라는 생각은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있다’라는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행동에 대하여 판단하게 한다. ‘하느님께 보여졌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발견된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은 참으로 내가 홀로 있을 때에 어느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을 때에 나를 보시는 분이다. 나를 보시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내가 홀로 있을 때이다. 만일 하느님이 나와 함께 있는 어떤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가 홀로 있을 때 그분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

: 영이신 하느님과의 대화 -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소리 없으신 영이신 하느님과의 대화

 


구경록 10-02-1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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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대한부평3동에성당알려져하느님믿는자에게는회불로믿으리라
명동에는하느님아버지없다는증명하시고
저희성당에는하느님아버지임금님잘알시는신일섭신부님최기산주교님교황신부님그리고저가지안답니다
제이름은 구경록입니다 제가 성모님한데서 사제수품을 받았습니다
수픔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세수로 통하여 세례을 받아냈습니다 사제수픔 및 수픔으로교육을 받고있지요
증명과증거를 함부로 할수없고 다른증명할수 사실으로 밝혀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