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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2-03 08:32
그리스도교 명상(요셉 라칭거 추기경- 교황 베네딕도 16세)
 글쓴이 : Ans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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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명상

(Orationis Formas)

 

그리스도교 명상의 일부 측면에 관하여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

 

1989. 10. 15.

신앙교리성

 

기도 형태

 

 

서 론

 

1. 기도 형태(Orationis Formas)에 관하여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참되고 완벽한 방법을 배우려는 강렬한 욕구에 불타고 있다. 물론 그들은 침묵과 묵상과 명상을 추구하면서, 현대 문명이 상당한 어려움들을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일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관심이 고조되어 왔는데 그들은 몇몇 동양 종교들이나 이들의 특수한 기도 방식들과 관련된 명상 방법들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현상은 영적인 묵상 그리고 신적 신비와의 심오한 만남에 대한 욕구를 보여 주는 뜻있는 표지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진리에 끝까지 충실하면서도 교회의 참된 전승이 제시해 온 방법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기도와 기도 생활 전반에서 지도하고 가르칠 수 있게 해 주는 방법, 교리·사목상의 특성을 지닌 확실한 기준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이 글의 의도는 이러한 절박한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여러 지역 교회들에서 새로운 기도 방식을 포함한 여러 가지 기도 방식들이 올바른 개인적, 공동체적 본질을 잃지 않도록 해 주려는 것이다.

이 지침들은 일차적으로 주교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지역 교회들을 염려하는 사목 정신을 지닌 주교들은 하느님의 온 백성-신부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이 새로운 활력을 지니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지도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2. 갈수록 빈번해지는 타종교들이나 이들의 상이한 기도 유형과 방법들을 접촉하면서, 최근 수년 동안 많은 신앙인들은 비그리스도교적 명상 방법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1)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하기 위해 그러한 방법들에 관심을 쏟는다. 또한 과학 기술에 힘입어 발전된 사회의 추진 속도에 얽매인 생활로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되면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기도 방법들 안에서 내적 평화와 심리적 균형을 이루는 길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학적 측면을 이 글에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글의 취지는 문제의 신학적이고 영적인 관계들을 강조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종교들과 문화들 사이의 개방과 교류에 몰두하면서 자기네들의 기도가 그러한 방법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최근에 여러 전통적 명상 방법들 특히 그리스도교적 방법들이 남용되어 왔다고 판단하면서, 지금까지 생소했던 요소들을 그리스도교적 유산에 통합시킴으로써, 새로운 방법을 기도 안에 도입함으로써 유산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3.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일반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심오한 본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기도가 타종교와 타문화들 안에서 발전되어 온 명상 방법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명백한 전제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적 기도를 결정짓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하느님과 피조물에 대한 진리 자체를 밝혀 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조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정확히 말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심오한 대화이다. 따라서 그것은 속량된 피조물이 거룩한 성삼위의 심오한 생명과 이루는 일치를 드러낸다. 세례성사와 교회 생활의 원천이고 절정인 성체성사 위에 바탕을 둔 이 일치는 회개의 자세 곧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전향의 태도를 뜻한다.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기도는 진정으로 개인적이며 공동체적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일종의 습성을 이룰 수 있는 자아 집중 또는 비인격적인 기교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며, 초월적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자유로이 개방시키지 못하는 영적 개인주의 안에 틀어박혀 기도하게 만드는 경향을 탈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진실되이 새로운 명상 방법을 추구하려면, 참다운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근본 요소는 두 자유 곧 하느님의 무한한 자유와 인간의 유한한 자유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이라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계시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적 기도

 

4. 성서 자체가 성서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구약성서 안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수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 계속 바쳐 왔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도 역시 줄기차게 애송되어 오면서 교회가 자신의 공식 기도의 바탕으로 채택한 훌륭한 기도 모음이 있다. 찬양 기도서 또는 시편이 바로 그것이다.2) 시편과 유사한 기도들도 역시 초기의 구약성서 본문들 안에서 발견되며 또는 후기의 성서 본문들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기도 한다.3) 시편의 기도들은 우선 하느님께서 몸소 선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이룩하신 위업들을 노래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놀라운 행위들을 기도 중에 회상하면서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거듭 자신들 가운데서 실현되고 있음을 자각한다.

성서의 계시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온 창조계와 모든 인간의 운명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느님을, 위험의 시기, 병고, 박해, 환난 중에서 구출해 주시는 분으로 찬양하며 간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구원 업적에 비추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능과 선, 정의의 자비, 왕다운 엄위 안에서 이스라엘로부터 찬양을 받으신다.

 

5. 신약성서 안에서는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와 수난과 부활에 힘입어 그분 안에서 당신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신 하느님의 궁극적 계시가 이루어졌음을 시인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 사랑의 가장 심오한 본질을 계시하는 하느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시는’(1고린 2,10) 성령께서 신자들의 마음 안에 오시어 그들이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루 다 가르쳐 주지 못했던 모든 것을 온전히 알려 주실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요한 16,13 이하)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단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그분 자신이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요한 16,15)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밝아진 안목에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느님의 계시를 온전히 인식하여 언제나 그 계시에 대하여 말하였다. 공관 복음서는 부활 이후에 얻게 된 더 깊은 이해와, 제자들이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들을 이야기한다. 요한 복음 전체는 처음부터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 엮어진 작품이다. 다마스쿠스를 향해 가던 길에서 하느님의 위엄을 갖추고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던 바오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훈계한다:“여러분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에페 3,18-19). 바오로에게 하느님의 신비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으며’(골로 2,3) 또한 바오로 사도가 ‘어떠한 궤변에도 넘어가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기’(골로 2,4) 때문이다.

 

6.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와 기도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계시 헌장」(Dei Verbum)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하여 ‘사람들을 자신의 벗으로 초대하고 받아들이시기 위하여 당신의 충만한 사랑으로 그들을 당신의 친구로 대하며 말씀하시고(출애 33,11; 요한 15,14`?15 참조) 그들 가운데로 내려오신다’(바룩 3,38 참조).4) 하느님의 계시는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둘은 서로 끊임없이 연관을 맺고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계시와 은총의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선물을 향해 모아진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인간이 신자들의 모임 안에서 그리고 은총의 도움을 받고 있는 각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행업을 받아들이고 묵상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흠숭할 수 있게 해 주신다.

바로 이런 까닭에 교회는 그리스도교 기도의 원천으로서 하느님 말씀의 봉독을 권장하고 아울러 모든 신자가 기도를 통하여 성서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도록 권유한다. “성서를 읽을 때에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가 따라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5)

 

7. 우리가 지금까지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사항들을 지적함으로써 몇 가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겠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움직임 안에 잠겨 들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의 근본 내용은 마땅히 그러한 움직임의 이중 방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성령 안에서 성자께서는 당신 행위와 수난을 통하여 성부께 세상을 화해시키러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반면에 이러한 동일한 움직임 안에서 그리고 같은 성령 안에서 강생하신 성자께서 당신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성부의 뜻을 실현하심으로써 성부께 복귀하셨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이 같은 움직임의 일치를 명백히 보여 준다. 이 기도에 따르면 천상 예루살렘 안에서 새로운 땅이 펼쳐질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일용할 양식, 용서와 보호를 위한 간청들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 뜻의 근본 차원들을 명확히 드러낸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6)는 교회 자신의 기도가 되었다(“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가 11,2).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비록 혼자서 기도할 때에도 그의 기도는 사실상 언제나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바쳐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공적이고 전례적인 방식으로든 사사로운 방식으로든 간에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또한 이 통공과 더불어 기도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교회의 참다운 정신 안에서 또한 교회의 지도 아래에 바쳐져야 한다. 교회의 지침은 때로 충분한 시험을 거쳐 영적 지도에 의해 구체적인 형식을 취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일 때와 은밀하게 기도할 때에도 역시 그 자신이 항상 그리스도와 성령과 모든 성인과 일치하여 교회의 선익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한다.7)

 

그릇된 기도 방식

 

8. 교회 역사의 초세기 때에도 일부 그릇된 기도 방식이 교회 안에 스며들었다. 몇몇 신약 성서 본문들(1요한 4,3:1디모 1,3-7:4,`3-4 참조)이 벌써 그러한 기도 방식들을 시사한다. 이어서 두 가지 중대한 탈선이 확인되었는데 거짓 영지주의와 메살리아니즘이 교회 교부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늘날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부들의 반응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체험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들은 많다.

위(僞) 영지주의8)의 오류들을 대적하면서 교부들은 사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성령 안에 항상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은총은 영혼이 본래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비추심 또는 초월적 인식(‘참 영지’)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피상적인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교부들에게 기도의 결실인 초월적 인식의 진정한 표지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적 사랑이다.

 

9.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완전성은, 한 근거로서 영지적 인식의 극치를 활용함으로써 평가될 수도 없고 메살리아니즘9)이 제안하듯이 신적인 것에 대한 체험과 관련되어 평가될 수도 없다. 4세기의 이 같은 그릇된 은사 운동은 성령께서 영혼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 체험과 성령의 은총을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운동들을 거슬러 교부들은 영혼이 기도 중에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가 신비로운 방식으로써 그리고 특히 교회의 성사들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더구나 그 일치는 역경이나 고독의 체험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메살리아니즘 주창자들의 견해와는 전혀 달리 고통이나 고독 따위는 성령께서 영혼을 방치해 오셨다는 것을 반드시 드러내는 표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영성의 대가들이 항상 분명히 시인해 온 바와 같이, 언제나 기도의 모델이며 중개자이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버림받은 상태에 진정 동참하는 것일 수 있다.10)

 

10. 이 두 가지 유형의 오류는 한결같이 죄인인 인간에게 유혹으로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것들은 인간에게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무한한 간격이 없어야 하는 것인 양 그 간격을 시험하고 극복하도록 자극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하시기 위하여 지상에서 취하신 방법을 이제는 낡아빠진 것으로 간주하게 하며, 순수한 은총으로 여겨져 왔던 것을 ‘초월적 인식’ 또는 체험으로 간주하면서 자연 심리학의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리도록 유도한다.

이런 그릇된 유형들은 교회의 기도를 둘러싸고 역사 안에서 줄기차게 등장해 왔으므로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종종 매혹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일종의 해결 방도로, 즉 심리적 또는 영신적인 치유책 또는 하느님을 신속하게 발견하는 방도로 그리스도인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11)

 

11. 그런데 이런 유형의 오류들은 어느 곳에서 발생되든 간에 그 특징이 아주 간단하게 밝혀질 수 있다.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 안에서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원 업적들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것의 깊이를 명상을 통해 파악하려고 애쓴다. 하느님의 이러한 신비들은 언제나 인간적?지상적 차원을 통하여 인간에게 드러난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로부터 출발하는 방법들을 포함하여 그와 유사한 명상 방법들은 가능한 한 지상적이거나 감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거나 또는 개념적으로 한정된 모든 것을 제외시키려 꾀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로 지상적인 것도, 감각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도, 개념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닌 신적인 것의 영역을 향해 상승하려는 시도 또는 그 영역 안으로 잠겨 들려는 시도인 것이다.12) 후기 희랍 시대의 종교적 감성들(특히 ‘네오 플라토니즘’) 안에 이미 드러나는 이런 경향은 무수한 사람들의 종교적 영감 안에 깊이 잠재해 있다. 그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신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묘사 및 신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시험적인 접근 안에 내포된 위험한 요소를 깨닫는 순간에 나타난다.

 

12. 오늘날 그리스도교 세계와 교회 공동체들 안에 동양의 명상법들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위험과 오류들로부터 벗어나지 아니한 시도 곧 그리스도교적 명상을 비그리스도교적 명상과 혼동하는 시도의 움직임이 현저히 거세게 일고 있는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 이 같은 방향에서 제시되고 있는 방안들은 무수히 많으며 또 어느 정도 과격하다. 어떤 사람들은 동양의 방법들을 오로지 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묵상을 위한 심리적 준비 단계로 활용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가지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특정 가톨릭 신비가들의 저서들 안에 묘사되어 있는 경험들과 유사한 영적 체험들을 겪으려고 애쓴다.13) 또 다른 부류의 어떤 사람들은 불교 이론14)에 고유한 것으로서 표상이나 개념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것을, 유한한 실재를 훨씬 능가하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위엄과 같은 수준 위에 서슴없이 올려 놓으려 한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부정 신학’을 활용한다. 부정 신학은 하느님의 본성을 표현하려고 추구하는 모든 단언을 아예 무시하고 또 이 지상의 사물들이 하느님의 무한성의 흔적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에 의해 역사 안에서 성취된 구원 업적들에 대한 묵상뿐 아니라 또한 ‘신성의 무한한 심연’15) 안에 잠겨 드는 데에 필수적인 상념 곧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상념까지 포기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방안들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명상을 동양의 명상법과 조화시키려는 그와 유사한 방안들은 혼합주의의 위험에 빠져들지 않도록 언제나 지속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고유한 방법들과 내용들을 지녀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그리스도교적 방법

 

13. 기도의 올바른 ‘길’을 발견하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의 뛰어난 면모들과 관련하여 이미 논의되어 온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양식’은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요한 4,34)이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심오하고 친숙한 일치를 이루신 가장 완전한 방법은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끊임없는 예수님의 심오한 기도로 표현되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에수님께서는 인류에게, 죄인들에게, 심지어 그의 처형자들에게도 파견되셨고 또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만 아버지와 가장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으셨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그분의 양식이라고 해서 그분께서 아버지께 자신을 일치시키시고 또 이 세상 안에서의 사명을 위한 새로운 힘을 아버지에게서 얻으시기 위하여 지상 생활 동안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시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셨다. 그분께서 아버지와 이루고 계신 일치로 영광스럽게 되신 타볼 산 위에서 그분께서는 자기 수난을 상기하셨으며(루가 9,31 참조) 또한 영광스러운 변모의 산 위에 ‘세 초막’을 지어 그 곳에 머물고자 하는 의도를 전혀 갖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교적 관상 기도는 언제나 이웃에 대한 사랑, 행동과 시련의 수락으로 인도하며 또한 분명히 이 때문에 그것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욱 가깝게 이끈다.

 

14.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신비를 희랍 교부들은 인간의 신화(神化)라고 불렀는데 그 신비에 가까이 나아가고 또 이를 실현하는 방법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우선 인간이 근본적으로 피조물이며16) 영원히 피조물로 존속하므로 인간의 자아가 은총의 최상 경지에 이를지라도 결코 신적 자아로 흡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인격이 하느님의 ‘모습과 닮은 꼴’로 창조되었으며 이 모습의 원형(原型)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 또 이분을 통하여 우리가 창조되었음(골로 1,16 참조)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원형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교적 신비를 드러낸다. 영원으로부터 성자께서는 성부와 관련하여 ‘다른’ 하느님이시면서, 성령 안에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시는’ 하느님이시다. 그 결과 이 ‘타자성’(구별)은 결핍이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위대한 선이다. 세 위격 안에서 단 하나의 본질을 이루시는 하느님 자신 안에 타자성이 있으며 또한 하느님과 피조물들 사이에도 타자성이 있다. 피조물은 본질상 하느님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성사들 안에서-그리고 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적과 말씀들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또한 우리를 그 자신의 신적 본성 안에 참여시켜 주신다.17)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몸소 지니신 우리의 창조된 본성 곧 인간성을 말살하지 않으신다.

 

15. 이러한 진리들을 한데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타종교의 기도가 나타내는 모든 영감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교의 실재 안에서 완성될 뿐 아니라 개별적 자아나 피조물의 본성이 절대자의 무한한 영역 안으로 흡수되어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놀랍게 발견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1요한 4,8). 이 심오한 그리스도교적 단언은 영원한 교류와 영원한 대화로써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 곧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사이에 존재하는 타자성과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서 이렇듯 영원한 교류이시며 또한 우리는 성자와 더불어 성령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입양된 아들’로서 진정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누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인간의 신화를 언급한 교부들의 가르침은 완전히 옳은 것이다. 인간은 본질상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됨으로써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신적 본성에 참여하게 되고 또 ‘성자 안에서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성부를 영광스럽게 하며, 참으로 하느님의 삼위일체 생명을 나누는 자가 된다.

 

방법에 관한 문제들

 

16. 기도 중에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노력해 온 대부분의 세계 종교들은 그 일치를 이루는 방법들을 가르쳐 왔다. ‘가톨릭 교회가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 것’18)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방법들이 단순히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아니라 하여 결코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그와는 반대로 기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견해와 논리, 요구 사항들이 결코 무시되지 않는 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우리는 그러한 방법들에서 취할 수 있다. 그런 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 생활의 전문가인 기도의 대가 그리고 그가 줄 수 있는 조언들의 겸손한 수락에 관해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초세기 때부터, 사막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시행되어 온 그러한 실행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교회와 더불어 느끼고 인식’하면서 전문가인 스승은 가르치고 특정 위험들을 경고해야 할 뿐 아니라 ‘영적 아버지’로서 자기의 제자를 역동적 방식으로 성령의 선물인 기도 생활의 핵심으로 이끌어야 한다.

 

17. 후기 비그리스도교적 고전 시대에는 완덕의 생활에 세 가지 단계 곧 정화의 길, 조명의 길, 일치의 길 사이에 편의상 구분이 있었다. 이 같은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적 영성의 여러 학파들을 위한 모델로 인용되어 왔다. 이런 분류는 그 자체로 유효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오해를 피하는 올바른 그리스도교적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너 가지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18. 기도를 통한 하느님 추구에 선행하고 수반되어야 할 것은 금욕적인 투쟁과 각자 자신의 죄와 오류로부터의 정화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마태 5,8)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와 사랑의 결핍으로부터 도덕적으로 정화되는 것이며,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순수하게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이기적인 본능으로부터 도덕적으로 깨끗해지는 것이다. 육정은 스토아 학파와 네오 플라톤 학파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기심으로 기울기가 쉽다. 그리스도인은 적극적 자유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육정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 적극적 자유의 상태가 고전적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무감동’(apatheia), 중세기에는 ‘무감각’(impassibilitas), 이냐시오의 영신 수련에서는 ‘초연’(indiferencia)19)이라 불리었다.

이는 (죄로 기우는 육정의) ‘극복’(극기; mortification)이라는 단어를 명백히 사용하는 성 바오로에게서 볼 수 있는 것20)과 같이 철저한 자기 부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자기 부정만이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성령의 자유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해 준다.

 

19. 그러므로 우리는,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하느님께 기울이면서, 모든 감각적 표현과 개념을 ‘비울 것’을 권장하는 스승들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요로써 충족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 수 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비움은 개인적 이기심을 포기하는 자기 극복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창조 세계의 사물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 중에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집중시켜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만큼 우리를 이기심에 얽어매는 이 세상의 사물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점에서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에게 훌륭한 선생이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면 외부 세계를 포기하고 여러분 자신 안으로 다시 들어가시오.” 하고 그는 말한다. 그는 계속 이렇게 훈계한다:“여러분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자신을 넘어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보다 더 심오하고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영혼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질을 찾고 있지만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께 대한 추구를 묵상해 왔고 또 창조물들을 통하여 하느님께 도달함으로써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완전한 특성’(로마 1,20)을 깨달으려고 애써 왔습니다.21) ‘우리 자신 안에 머문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교회의 위대한 박사는 우리 자신 안에 주의력을 집중시키면서 동시에 하느님이 아니고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의 자아를 초월하기를 권장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가장 깊은 존재보다 훨씬 더 심오하시며 나의 가장 높은 존재보다 훨씬 더 높으시다.”22) 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당신의 신비 안에서 우리를 초월해 계신다.23)

 

20. 교의적 관점에서 볼 때에,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당신 성자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자기 양도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다. 성자 안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는 순수한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만 그분의 인간적 형상을 보는 것과 외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기”(요한 6,63) 때문이다. 그 말씀은 오히려 신앙의 은총으로써 가능한 안목을 뜻한다. 그것은 감각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그분께서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하느님에 대하여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시는 바를 보는 것이다.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안목’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그 형상으로부터 순전히 인간적으로 ‘추론하는 것’(ab-stractio)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인간적 형상 안에서 신적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간적 형식을 취한 예수님의 영원한 신적 차원을 파악하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가 「영신 수련」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시작해 온 유한한 계시 진리로부터 출발하여 점차로 ‘신성의 무한한 향기와 무한한 감미로움’(124항)을 포착하려고 애써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들어 높이실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서 우리를 붙잡아 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며 또한 당신의 영원한 사랑의 삼위일체 생명 안으로 우리를 온전히 끌어들이실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우시다. 그러나 이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을 뿐이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선물은 결코 하느님의 계시로부터 우리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21.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과정 중에 ‘조명’은 ‘정화’에 뒤이어 오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성자 안에서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사랑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성자로부터 받게 되는 도유를 통하여 이루어진다(1요한 2,20 참조). 그리스도교 초기 이후부터 줄곧 교회 저술가들은 세례성사 때에 받게 되는 ‘조명’에 관해 언급해 왔다. 신자들은 하느님의 신비에 입문하고 난 다음에, 이 조명에 힘입어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어떤 교회 저술가들은 세례 때에 받게 되는 조명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귀한 인식(필립 3,8 참조)의 바탕이라고까지 명백히 단언한다. 그들은 이 조명을 ‘인식’(theoria) 또는 ‘관상’이라 규정한다.24) 세례성사의 은총을 받는 신자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더 깊은 인식’25)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지식과 증언을 향상시켜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은 신앙의 진리들을 절대로 흐리지 않는다. 그 이후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실 조명의 은총들은 교회에 의해 고백되고 경축되는 신비들의 깊이를 더욱더 명확히 이해하도록 도와 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당신의 찬란한 빛 가운데서 당신의 영광 속에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주 대할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1요한 3,2 참조).

 

22.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해 주신다면 일치의 특별한 체험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성사들 특히 세례성사와 성체성사26)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의 객관적 출발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의 특별한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과 특유한 형태로 일치할 수 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 용어로써 신비로운 일치라 부른다.

 

23. 그리스도인은 주의력을 집중시키고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그분의 길을 재발견하기 위하여 고독 속으로 잠겨 드는 특정한 시기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그는 피조물로서 그리고 은총 안에서만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피조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그의 방법은 엄격한 의미에서 기교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다. 기교로서의 기도 방법은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어린 아이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일지 모른다. 순수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기술과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며 또한 그 선물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부당한 자임을 깨닫는다.27)

 

24. 교회 단체들의 설립을 도와 주기 위하여 그 창설자들에게 그리고 다른 성인들에게도 부여되는 특별한 신비로운 은총들이 있다. 이런 은총들이 그들의 개인적 기도 체험을 특징지어주며 또한 그 자체가 신앙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 심지어 같은 교회 단체에 속해 있는 자들과 더 완전한 기도 방법을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모방과 염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28) 창설자의 기도 체험을 함께 나누는 다른 수준이나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 있다. 모든 것이 엄밀히 같은 것일 수는 없다. 그 밖에도 예나 지금이나 순수한 모든 교회 단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기도 체험은 결국에는 항상 개인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청원자에게 개별적으로 은총을 베푸신다.

 

25.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성령의 선물들과 하느님께서 전적으로 거저 베푸시는 은사들을 구별해야 한다. 성령의 선물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망·애덕의 생활을 위한 열정으로써 자신을 북돋울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중한 금욕적 노력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체험 그리고 신앙의 내용들에 대한 특별한 체험에 도달할 수 있다. 은사에 관해서 사도 바오로는 그것들이 무엇보다도 교회,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한다(1고린 12,17 참조). 이를 염두에 두고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곧 은사들은 예외적인 ‘신비로운’ 선물들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로마 12,3-21 참조) 또 ‘성령의 선물들’과 ‘은사들’의 구분은 유동적일 수 있다. 분명히 교회를 위한 결실을 가져다 주는 은사의 신약성서의 문맥 안에서 볼 때 특정 수준의 개인적 완덕 없이도 시행될 수 있으며, 반면에 ‘활동적인’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직자들과 이루는 친교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기 위한’(에페 4,15-16 참조)29) 특별한 과제를 (그리고 이런 뜻으로 ‘은사’를) 지닌다. 성직자들은 ‘사실상 성령의 불을 끄지 않고 모든 것을 분간하여 좋은 것을 보존해야 할’(교회 헌장, 12항) 책임이 있다.

 

심리적-신체적 방법들

 

26. 인간 경험에 따르면 신체의 자세와 태도 역시 정신의 집중과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일부 동서양의 그리스도교 영성 작가들이 관심을 쏟아 온 부분이다.

그들의 의견은 동양의 비그리스도교적 명상 방법들과 공통되는 점들을 나타내면서도 동양의 비그리스도교적 명상법들의 과장된 측면들과 편파적 측면들을 배제한다. 그런데도 때로 그러한 측면들이 충분한 훈련을 받지 않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권장되고 있다.

영성 작가들은 기도 중에 더 쉽게 주의력을 집중시켜 주는 요소들을 채택하면서도 아울러 그것들의 상대적 가치를 인식해 왔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목표와 일치하여 재조정된다면 유용한 것일 수 있다.30) 예컨대, 그리스도교적 단식은 무엇보다도 참회와 희생의 실천을 의미하지만 이미 교부들에게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더욱 개방하게 하며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더 통제하게 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해 주려는 목적을 지녔다.

모든 사람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며 또한 인간의 몸은 묵상에 가장 적합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31) 그러한 자세는 상징적인 방식으로써 문화와 개인적 감수성에 따라 기도 자세를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각자 자신의 신체적 자세가 얼마나 기도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7. 동양의 그리스도교적 명상법32)은 가끔 서양의 기도 방식들 안에 결여되어 있는 정신 생리학적인 상징주의의 가치를 인정해 왔다. 그 영역은 특별한 신체적 자세에서부터 호흡이나 심장의 박동과 같은 기본적 생명 기능에 이르기까지 확장될 수 있다. 예컨대, “예수님 기도”의 실천은 호흡의 자연적 리듬에 적응된 것으로서 적어도 일정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다.33) 반면에 동양의 기도 스승들은 스스로, 모든 사람이 물질적 표징으로부터, 추구되고 있는 영적 실재로 옮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동등하게 이 상징주의의 활용에 적격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왔다. 상징주의는 부적절하고 그릇된 방식으로 이해될 경우에 우상이 되기까지 하며 그리하여 마음을 하느님께 들어 높이는 데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우리 각자의 기도 안에서 상징으로서의 몸에 대한 온전한 인식을 실제로 생활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몸의 숭배로 전락시킬 수도 있으며 모든 신체적 느낌을 영적 체험으로 간주하게 되는 방향으로 은연 중에 이끌 수도 있다.

 

28. 어떤 신체적 행위들은 평온과 긴장 완화의 느낌, 유쾌한 감정, 아마도 영적 안녕과 흡사한 빛과 따스함의 현상들을 자동적으로 받게 된다. 그러한 느낌들을 성령의 참다운 위안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성 생활을 전적으로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도덕적 상태가 신비적 체험에 부응하지 않을 때, 신비적 체험의 특유한 상징적 의미를 그 느낌들에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 분열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증세는 또한 심리적 불안정, 때로는 도덕적 탈선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양의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 세계 종교들로부터 생겨난 정당한 명상 방법들이 기도하는 사람이 외적인 압력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내적 평화를 누리며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 주기에 적절한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명상 방법들이 분열되고 삶의 방향을 상실한 현대의 인간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서 안에서 ‘지속적인 기도’34)라 지칭되고 있는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일치 곧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한 내면적 각성과 탄원의 태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고하며 이웃을 보살펴 주는 일에 헌신할 때에 절대로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고린 10,31) 하고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영성 대가들이 가르치는 대로 순수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협력하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형제들에게 봉사하도록 해 주는 열렬한 애덕을 불러일으킨다.35)

 

“나는 길이다”

 

29. 그리스도교 기도에 대해 교회가 제시하는 다양하고 풍성한 측면들로부터 각 신자들은 자신의 방식을, 고유한 기도 방식을 추구하고 발견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개인적 기도 방식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몸소 가르치고 실천하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길을 추구하면서 자기의 개인적 취향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인도하시는 성령에 이끌려 나아가도록 자신을 내맡겨야 할 것이다.

 

30. 그런데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사막’ 안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또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진지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시련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그는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는 기도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되는 이러한 체험을 무턱대고 신비적 의미의 ‘어둔 밤’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어떻든 그러한 순간에, 그가 지속시키려고 꾸준히 애쓰는 기도는 사실상 인위적인 것과는 전혀 다를지라도 일종의 ‘인위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그러한 순간에 하느님께 대한 그의 ‘신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자신이 주관적인 위안을 전혀 보답받지 못할 때에라도 하느님께 끝까지 신실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표면상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순간에, 기도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해진다. 곧 당신의 무한한 자유 안에서 언제나 그 자신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을 진실로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자신의 ‘체험들’이 하느님과 이루는 일치에서 오는 긍정적 ‘체험’이든 신비적 ‘자기 비움’에서 오는 소극적 ‘체험’이든 간에 그러한 체험들을 넘어서려고 애쓰지 않는 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추구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진다.

 

31. 그리스도교적 관상의 유일한 대상인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유형이든 상관없이 방법이나 기교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 실재이다. 기술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에까지 이르렀으며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처지까지 겪으셨기(마르 13,34 참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어떤 방식을 몸소 결정하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 내맡겨 드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관상의 대상인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과 동일한 수준 위에 우리 자신을 올려 놓으려는 유혹을 모두 끊어 버려야 한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자비와 우리 믿음 안에 파견되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사랑의 감각적 숙고를 은혜로운 선물로 받고 또 주님의 진·선·미에 이끌리고 있음을 느낄 때에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

피조물이 하느님과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수록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 그가 지니는 경외심은 더욱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당신께서는 저를 친구라 부르시지만 저는 자신을 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36) 또는 우리에게 한층 잘 알려진 말씀으로서 하느님과 가장 높은 경지의 친밀함을 누리신 마리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주님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루가 1,48).

 

추신:이 서한은 신앙교리성의 총회 때에 작성된 것인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아래에 서명한 라칭거 추기경 장관이 알현하는 중에 이 서한을 승인하셨고 또 발행을 명하셨다.

 

 

로마에서, 신앙교리성으로부터

1989년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축일에

장관 요셉 라칭거 추기경

차관 알베르토 보보네 대주교

 

 

1) ‘동양의 방법’이란 표현은 ‘선(禪)’, 초월적 ‘명상’ 또는 ‘요가’와 같이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계발된 방법들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명상 중에도 드물지 않게 채택되고 있는 비그리스도교 극동 지역의 명상법을 가리킨다. 이 문헌 안에 내포된 원칙들과 방법들의 방향은 이 문제를 위해서뿐 아니라 더 객관적인 방식으로 오늘날 교회 조직체들 특히 연합체와 운동들과 단체들 안에서 시행되고 있는 상이한 형태의 기도를 위해서도 참조되어야 할 기본 사항으로서 도움을 제공해 주려는 것이다.

2) 시편과 그리스도교 기도, 「성무일도 총지침」 100-109항(성무일도I, 61-64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을 참조할 것.

3) 예컨대, 출애 15, 신명 32, 1사무 2, 2사무 22 그리고 몇몇 예언서 본문들, 1역대 16 참조.

4) 계시 헌장(Dei Verbum), 2항. 이 문헌은 그리스도교적 기도에 대한 신학적이고 영성적 이해를 위한 다른 기본 지침들을 제공해 준다:또한 3,5,8,21항을 참조할 것.

5) 계시 헌장, 25항.

6) 그리스도의 기도, 「성무일도 총지침」 3-4항을 참조할 것.

7) 「성무일도 총지침」 9항 참조.

8) 위(僞) 영지주의는 사물을 불결하고 타락한 것이며 또 영혼을 무지 안에 가두어 버린 일종의 ‘감옥’으로 간주하였다. 이 이단에 따르면 기도가 영혼을 참된 초월적 지식으로 그리고 순수한 상태로 들어 높임으로써 무지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영적인 자들뿐이다. 평범한 신앙인들에게는 신앙과 그리스도의 계명 준수만으로 충분하다.

19) 메살리아인들은 이미 성 에프렘 시루스에게(Hymni contra Haereses 22,4:E.Beck가 출판한 CSCO 169, 1957, 79면), 그리고 그 이후에 다른 이들 가운데 살라미나 에피파니우스(Adversus Haereses라 불리기도 하는 Panarion:PG 41, 156-1200:PG 42, 9-832) 또한 이코니움의 주교 암필로키우스(Contra Haereticos:G. Ficker, Amphilochiana 1, Leipzig 1906, 21-77)에게 고발당하였다.

10) 예를 들면, 십자가의 성 요한, Subida del Monte Carmelo 2권, 7,11장.

11) 중세기에 교회의 변두리에는 극단적인 추세가 있었다. 이런 추세를 Flemish Jan Van Ruysbroeck와 같은 훌륭한 그리스도교 관상가가 묘사했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신비적 생활 안에 있는 세 가지 유형의 탈선을 구별하였고(Die gheestelike Brulocht 228, 12-230, 17:230, 18-32, 22:232,23-236, 6) 또 이런 유형들을 총괄적으로 비판하였다(236, 7-237, 29). 뒤이어 유사한 기교들이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 의해 확인되고 기각되었다. 이 성녀는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관심 자체가 마음으로 아주 많이 생각하도록 충동질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를 그리스도교적 명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항상 ‘배신 행위’라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Vida 12,5 그리고 22, 1-5 참조).

1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모범과 가르침을 전체 교회에 지적해 주셨다. 그녀는 일생 동안, 신성의 심연 안에 막연하게 자신을 잠겨 들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제쳐놓으려는 특정 방법들의 유혹을 배격해야 했다. 1982년 11월 1일 강론 중에 교황께서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집중되어 있는 기도를 주창한 성녀 데레사의 호소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단언하시면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그것은 복음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은 정신적 공허를 중시하여 실제로 그리스도를 제껴 놓으려는 일부 기도 방식을 배격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 모든 기도 방식이 유효한 것이 되려면 그리스도에 의해 활력을 지니고 또한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요한 14,6 참조)에게로 이르는 것이어야 한다.”:Homilia Abulae habita in honorem Sanctae Teresiae:AAS 75(1983), 256-257.

13) 예컨대, 4세기 익명의 영국인 작가가 쓴 영성 작품 「무지의 구름」(클립톤 월터즈:현대어 번역과 서문, 성 바오로 출판사, 1987)을 보라.

14) 불교의 경전에서 ‘니르바나’(열반)의 개념은 평온의 상태, 모든 감각적 실재의 소멸로 구성되는 상태로 이해되고 있다. 감각적 실재는 일시적이고 현혹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15) M. 에카르트는 ‘신성의 불확실한 심연’ 안에 잠겨 드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이 심연은 ‘성삼위의 빛이 절대로 비치지 않는 어둠’이다. 말미에 수록된 설교문 Ave Gratia Plena(J. Quint, Deutsche Predigten und Traktate, Hanser 1955, 261 참조).

16) 사목 헌장 (Gaudium et Spes), 19항:“인간 존엄성의 가장 숭고한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과 결합되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날 때부터 하느님과 더불어 대화하도록 초대받고 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지탱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도 없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며 자신을 창조주께 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인간이 진리를 따라 산다고 할 수 없다.”

17) 성 토마스가 성체성사에 관해 기술한 바와 같이 ‘이 성사의 고유한 효과는 인간이 그리스도 안으로 변화되는 데에 있다. 우리는 사도와 더불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In IV, Sent., d 12, q. 2, a. 1).

18) 비그리스도교 선언(Nostra aetate), 2항.

19)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 수련」(Ejercicios espirituales`), 23항과 도처에.

20) 골로 3,5:로마 6,11 이하:갈라 5,24 참조.

21) 성 아우구스티노, Enarrationes in Psalmos XLI, 8:PL 36, 469.

22)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3,6,11:PL 32, 688 참조, Devera Re-ligione 39,72:PL 34,154.

23) 피조물들의 ‘비움’이 지니는 그리스도교적인 적극적 의미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모범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피조물들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충만되어 있으며 또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고유한 품위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자기 작품 Cantico delle Creature(피조물들의 찬가) 안에서 피조물들의 존재가 은밀히 읊는 찬미가를 서술한다:C. Esser, Opuscula sancti Patris Francisci Assiensis, Ed. Ad Claras Aquas, Grottaferrata (Roma) 1978, 83-86면 참조. 똑같은 방식으로 그는 「모든 신도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하늘과 땅과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묵시 5,13)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영광과 영예를 드리며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도록 하여라.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이고 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 홀로 선하시고(루가 18,19), 그분 홀로 지극히 높으시고, 그분 홀로 전능하시며 찬미 받으시고 영광스러우시고 거룩하시며 영영 세세에 찬양과 축복을 받아 마땅하시다. 아멘.”(앞의 책, Opuscula…124면). 성 보나벤투라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프란치스코가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파악하였고 또 그의 영혼 안에 훌륭한 감사와 찬양 노래가 넘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Legenda S. Francisci, 9장, 1항, in Opera Omnia, ed Quaracchi 1898, vol. VIII, 530면 참조).

24) 예컨대,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보라:성 유스티노의 Apologia I, 61, 12-13:PG 6,420-42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Paedagogus I, 6, 25-31:PG 8,281-284:카이사리아의 성 바실리오, Homiliae diversae 13,1:PG 31, 424-425: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Orationes 40, 311:PG 36, 361.

25) 계시 헌장, 8항.

26) 교회 헌장(Lumen Gentium)이 성체성사에 대해 단언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원천이고 절정’(LG, 11항)으로서 우리를 ‘실제로 주님의 몸 안에 일치시켜 준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과 결합되는 것이다’(LG, 7항).

27) 예수의 성녀 데레사, 「영혼의 성」(Castillo interion) IV, 1,2 참조.

28) 기도하는 사람은 특별한 은총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갈망하지 않는다. 성 베네딕토가 인정한 바와 같이 성 그레고리오가 그러하였다. 또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을 관상할 때에 작용하였던 신비로운 충동 또는 성 이냐시오가 가르도너 강변에서 부여받은 계시에 대한 전면적 안목 따위를 기도하는 사람은 특별한 은총 없이는 갈망하지 않는다. 이냐시오는 이 안목이 자신에게는 성서를 대신할 수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묘사한 ‘어둔 밤’은 자신의 개인적 기도 은사의 한 부분이다. 그가 속해 있던 수도회의 모든 회원이 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허락해 주신 기도의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써 그 은사를 체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29) 그리스도인이 초대받은 ‘신비적’ 체험 안에서 성 토마스가 성령의 선물들을 통한 하느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라고 분류한 것 그리고 은총이 부여되는 독특한 방식이(또한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그런 방식들을 결코 열망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 포함될 수 있다: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II, 1c 그리고 a. 5 ad 1 참조.

30)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중에 취하는 자세에 관해 말하는 초기 작가들을 예로 들면:테르툴리아누스, De oratione XIV:PL 1,11 70, XVI:PL 1, 1174-1176; 오리게네스, De oratione XXXI, 2:PG 11, 550-553. 그리고 그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바르나바, Epistula XII, 2-4:PG 2, 760-761; 성 유스티노, Dialogus 90, 4-5:PG 6, 689-692; 로마의 성 히폴리토, Commentarium in Dan. III, 24:GCS I, 168,8-17; 오리게네스, Homiliae in Ex. XI, 4:PG 12, 377-378. 몸의 자세에 대하여 또한 오리게네스, De orationne XXXI, 3:PG 553-555을 참조할 것.

31)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 수련」, 76항 참조.

32) 헤시카스트(Hesychast) 은둔자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은둔자들은 헤시키아(Hesychia) 또는 외적이고 내적 평온을 기도의 한 조건으로 간주한다. 동양의 방식 안에서 그런 평온은 고독과 묵상 기술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33) 성서 인용구로 풍성한 호소와 간청의 일정한 양식문(예컨대,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을 반복하는 것으로 구성된 ‘예수님 기도’의 실천은 호흡의 자연적 리듬에 적용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영신 수련」, 258항을 볼 것.

34) 1데살 5,17:2데살 3,8-12 참조. 이 구절들과 다른 본문들로부터 일의 의무와 기도의 의무를 지속적으로 융화시키는 방법의 문제가 제시된다. 다른 작품들 가운데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Epistula 130. 20:PL 33,501-502와 성 요한 카시아노의 De institutis coenobiorum III, 1-3:SC 109,92-93을 참조할 것. 또한 시리아 교회의 최초 교부인 아프라아트가 저술한 Demonstration of Prayer(기도에 관한 해설)을, 특히 이른바 ‘기도의 행위’들을 다루는 14-15항목들을 참조하라(Afraatis Sapientis Persae Demonstrationes, IV:PS 1, J. Parisot 출판사 170-174면 참조).

35) 예수의 성녀 데레사, 「영혼의 성」 VII, 4,6 참조.

36) 성 아우구스티노, Enarrationes in Psalmos CXL II, 6:PL 37,1849:Tract in Ioh. IV, 9:PL 35,1410:“(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에게 합당한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아니할 때에라도 진정 성령으로 충만하셨다. 그리하여 종이 주인을 알아보았고 또 종으로서 친구가 될 자격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10-05-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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휼륭하신 교황님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교황님을 필두로 신앙의 모든 측면에서 성교회가 하나되고, 일치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