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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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1-24 20:33
박석희 주교님의 피정노트 - 애쓰지 않고 성공하는 법 <가장 위대한 자>
 글쓴이 : Anse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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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자>

 

위대하게 되는 것, 형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가 되고 하느님께 가장 가까이 가는 자 등의 표현은 복음에도 있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두 아들의 장래를 부탁하였을 때, 제베데오의 가족은 위대함을, 물질적으로 알아 들었지 영적으로 알아듣지 않았다. 물질적 개념으로 영적인 것을 추구할 때에 나오는 어려움이다. 그들은 영적 위대함을 몰랐으니, 결국 자기들이 청한 것이 무어신지 몰랐다. 위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가 되는 것이다. 영예와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자, 종과 노예의 자리이다. 영적으로 위대함이란 역설적인 언어 표현이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위대하게 되는 방식을 말씀하신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가 22,24-27)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위대하게 되는 것은 낮은 자가 되는 것이고, 제자로의 위대함은 그냥 위대함이 아니고 영적인 위대함이다.

 

우리는 말하는 동물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된다. 제자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는 과정으로 새롭게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도 배워야 했다. 말의 회개(바꾸는 것)는 곧 삶의 회개이다. 말을 바꾸지 않을 수 없음에서 삶의 방식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새로운 말을 배우는 것은 새로운 삶을 배우는 것이다. 삶의 변화없이는 새로운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 천문학자의 삶을 보고 그의 이론이 진리라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것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어 있다.

영적 위대함이란 말도 제자들이 삶을 바꾸지 않고는 이해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 말의 의미도 전달할 수도 없다. 제자들이 말과 삶을 바꾼 이 혁명을 단지 그들이 가졌던 위대함에 대한 자기 생각만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것봐 더 위대한 어떤 지위를 추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영적으로 위대한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야망 대신에 다른 야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야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바뀌어진 다른 야망을(아직도 물질적인)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와는 반대되는 어떤 것을 야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자세는 단순히 정상적인 가치들을 바꾸는 것일 뿐이다. 갈망하는 어떤 상태의 삶을 추구하는 야망을 그대로 있는 아직도 야심적인 삶의 태도이다. 이런 야망이 있는 한 가난을 재산의 형식으로 바꾸는 것이고, 밑자리를 첫 자리보다 명예롭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의 과정적 질서 안에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관점은 어떤 부(富)도(가난의 富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며, 어떤 영예나 자리도 갖고자 경쟁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도대체 경쟁적이 아니다. 영예로운 자리를 추구하는 것은 타자의 상대적인 자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수석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다른 사람을 수석의 자리에서 내치는 것이다. 만일 말석에 앉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을 말석에서 내치는 것이다. 말석에 앉고자 하는 그것도 아직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자지 눈으로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참된 위대함이란 야망의 대상이 아니고 위대하게 되는 방식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타인을 더 좋아하고, 종이 되고, 다른 사람의 배려하에 있고, 자기의 것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로마 12,10; 필립 2,3-4; 1고린 13,5)

 

그리스도교적인 위대함이란 다른 사람이 나의 봉사를 받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선택해 준 자리에 있기를 만족하고 자기 야망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요구로 결정된 자리에(비록 그것이 권위를 가진 자리일지라도)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배려에 따라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밑자리에 있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자리에 앉게 되는 것도 어떤 자리에 이르고자 전혀 노력하지 않음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제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특별히 아무데도 가지 않는 자들이다. 그가 움직이고 있다 해도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도 천국이 목표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영적인 목표이다. 천국이 목표라면 그는 전혀 목표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말은 이미 거기 가 있다는 말을 동시에 쓸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에페 2,6)

 

아무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목표를 얻었다는 것이다. 목표를 추구하면 목표를 추구하는 활동이 있게 된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을 보이지 않는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사람들은 이 목적 달성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또 어떤 사람과 경쟁을 하기도 한다. 경쟁으로 나를 방해하지 않으면 목적지향 행동을 여러 가지로 방해할 수 있게 도고, 목적지향을 하는 사람은 이런 방해를 받기 싫어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렇게 방해 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마태 5,41).

요구되는 것보다 더 많이 준다면 강요 당하는 것이 없다. 자유로울 수 있다. 만일 내가 천국이 나의 목적이면 아무도 이 길에 방해하는 자가 없다. 다른 사람의 요구가 이 목적지로 하는 길을 어렵게 만들지 않는다. 내가 가고자 원하는 나 자신의 요구보다는 타인의 요구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어디엔가를 가야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면 이미 천국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천국에로의 길은 영적인 길이다. 하나의 길이 아니고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데서 얻어지는 것이 천국이다.

 

 

제6장 기도

 

<하느님께 말씀드림과 하느님께서 여기 계심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