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뢰. 사랑. 두려움 : 신앙의 말

인격적 신앙은 하느님께만 나의 전 존재를 의존하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 이외의 어떤 것, 어떤 사람에도 신뢰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존해야 한다. 우선 창조주와 피조물을 실제적으로 구별해 놓고 시작한다.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다. 또 두려움, 신뢰, 희망, 사랑의 대상들도 얼마든지 많이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명단들 중에 하느님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과 세계는 함께 그 명단에 나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의 대상들을 나열하는 명단 안에 하느님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명단에 나타나지 않을 때에만 나타난다. 하느님과 세상은 함께 셀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이 아니신 분, 이 세상의 어떤 것과 같은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너희는 제후들을 믿지 마라, 구원을 주지 못하는 인간을. 그 얼이 나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날로 그의 모든 계획도 사라진다.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도움으로 삼는 이 자기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 146,3-5)

사람의 영광과 하느님이 주시는 영광 :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사람에게 보이는 것과 하느님께 보이는 것 :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 6,17-18)

주님의 잔과 사람의 잔, 주님의 식탁과 사람의 식탁 : “여러분이 주님의 잔도 마시고 마귀들의 잔도 마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식탁에도 참여하고 마귀들의 식탁에도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1코린 10,21)

사람의 구원과 하느님의 구원은 다른 것이다 : “병력이 많다고 임금이 승리하지 못하며 근력이 세다고 용사가 제 몸을 살리지 못하네. 기마로 승리한다 함은 환상이며 그 힘이 세다고 구원을 이루지 못하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그들의 목숨을 죽음에서 구하시고 굶주릴 때 그들을 살리시기 위함이라네.”(시편 33,16-19)

이 모든 예들은 그리스도교의 권위 있는 정전에서 뽑은 것들로써 모두 하느님과 세상을 실제적으로 분리시킨다. 내가 하느님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게 되면 나는 그것을 다른 어떤 이를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인가 행하시면 다른 어떤 이가 그것을 나에게 행한 것은 아니다. 만일 다른 이들이 무엇인가 나를 이해 행한 것은 하느님이 행하신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다른 이를 위하여 어떤 것을 행하면 그것은 하느님께 행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어떤 행위자들이나 인격자들이나 사물들의 명단에 속하지 않으신다.

신뢰, 두려움, 희망 등등의 대상들을 이 지상에서 나열할 수 있으나 이 세상과 천상을 함께 나열할 수는 없다. 지상의 것들과 천상의 것들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과 하느님, 세상과 천상은 논리적으로 불연속이다. 이 양자에 동시에 어떤 사물을 함께 배분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쓰이는 언어와 세상 것들에 사용되는 언어는 방식이 다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느님과 인간에게 신뢰를 둘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제1장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말의 뜻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과 하늘에다 보화를 쌓는 것을 볼 수 있는가? 만일 베드로가 마리아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서로 신뢰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신뢰하는 자와 신뢰받는 자를 볼 수 있고 그들이 서로 신뢰하고 잇다는 것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유대를 보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느님을 신뢰하고 있을 때에는 베드로가 마리아를 신뢰할 때처럼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우리는 베드로가 신뢰하고 있다고 하는 하느님을 볼 수 없으며 우리가 보는 것은 베드로가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에게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의존하면 곧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은 특별한 類의 신뢰이다. 베드로가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아무리 일이 나쁘게 되더라도 하느님이 나를 도우시리라고 나는 믿어.”하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하느님을 신뢰하는 생동을 보게 된다. 그 행동을 통해 하느님은 거기에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의 행동에는 베드로가 신뢰하는 어떤 분이 부재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신뢰하는 분을, 우리가 볼 수 없는 부재 현상 가운데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은 베드로가 마리아를 신뢰하는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 세상 어떤 것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을 때 그때에서야 하느님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삶의 태도, 행동과 말에 있어서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어려운 상황이나 반대를 받고 몰리는 때라도, 그를 그 어려움에서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어도 조용하고 차분하게 확신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 의존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것에도 신뢰하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신뢰를 두는 것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때 그것은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라. 하느님께 의존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항상 무엇이나 누구에게만 신뢰를 한다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할 때는 어떤 것에도 신뢰하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삶의 가능성이 폭이 넓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신뢰한다’라는 명제는 ‘마리아를 신뢰한다’라는 명제와 논리적으로 완전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