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빈 자리

이제 수도승 삶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겸손입니다. 겸손은 수도원을 찾는 이들의 눈에 즉시 보이는 덕행은 아니지만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흄 추기경은 “겸손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지만 겸손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위하여 빈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머무르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하느님의 자리로 만드는 것은 결국 겸손입니다.

오늘날은 겸손에 대한 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는 차라리 그 반대라 할 지나친 자기주장과 자기 확신을 키우라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아주 단호하게 자신을 앞으로 내세우는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우리는 겸손의 일곱 단계에서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라고 말한 예언자의 말을 우리 자신의 말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규칙서를 읽으며 주춤합니다. 우리가 너무 자신만만해서 일까요? 아니면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고 자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분명 자신이 벌레와 같다고 말할 용기가 없는 듯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두려움 때문이겠지요.

어떻게 우리의 공동체를 겸손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표징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폭력적이고 자기과시적인 세상에 겸손의 그 깊은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그것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스승 베네딕도는 겸손의 대가였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저희 도미니코회 수사들에게서도 이 겸손의 미덕을 잘 볼 수 있었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에 대한 제 부족한 견해를 감히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겸손을 생각할 때, 그것을 쉽게 아주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얼마나 가치 없는 벌레와도 같은 존재인지를 살피는 그런 겸손 말입니다. 그런 식의 겸손은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탐색에 불과합니다. 베네딕도는 이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의미로, 경쟁이나 비교, 패권을 차지하려는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세우라고 우리를 초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서로 순종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그 누구도 중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 중심은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고, 그 텅 빈 자리는 하느님의 영광으로 채워집니다. 고독한 자로 자기 자신에 몰두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중심축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현대적 이미지의 자아에 이것은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아는 자기 정체성의 심장부에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수도승의 삶은 중심이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 우리를 끌어당기는 은총의 견인력에 자신을 내어 맡기라는 초대입니다. 중심에서 빠져나오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공허하게 텅 빈 장소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공동체의 중심, 하느님을 위하여 마련되어 온 그 우묵하게 빈 자리에 그분은 계십니다. ‘말씀’이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실 집, 곧 하느님이 거처하실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중심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한 하느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경멸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아주 형편없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은 말씀께서 당신의 천막을 치실 수 있도록 공동체의 심장부에 텅 비어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빠스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말씀드리기는 좀 망설여집니다. 저희 도미니코회는 과거에 마태오라는 단 한 명의 아빠스가 있었는데 그것은 차라리 재난이었습니다. 물론 저희는 그 후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아빠스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수도회의 장상은 공동체의 중심에 하느님을 위한 자리를 비우고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전례 안에서 그 아름다움이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찬양 위에 자리하셨습니다. 수도승들이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겸손의 아름다움과 자유를 체험합니다. 중세기 사람들은, 조화로운 공동체가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음악은 공동체와 영혼을 치유합니다. 각 구성원이 각자 더 크게 부르려고 아우성이거나 더 많은 찬사를 받으려고 서로 경쟁한다면 함께 노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자리에서 전체와의 조화를 의식하며 자신의 악보를 다른 이들과 함께 노래하는 것은 우리를 하나로 일치시켜 준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런 찬미의 노래는 경쟁하거나 대항하지 않고 함께 사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아빠스는 선두에 나서서 설치고 주도하는 인물이 된다든지 수도원의 파바로티나 되는 양 모두의 목소리를 압도해 버리는 그런 역할을 거절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아빠스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조화가 수도원을 다스리는 법이 되게 할 것입니다. 한 공동체가 어떻게 노래하는지 들으면 그들이 어떻게 함께 사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승과 도미니코회 탁발승들이 어떻게 다른지 그들이 노래하는 것을 보면 즉시 알 수 있습니다.

겸손의 절정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중심조차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이 머무시는 텅 빈 자리는 공동체의 중심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중심에도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 하느님이 당신의 거처를 만드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매 순간 존재하기를 허락하시는 피조물입니다. 모네레알레 성당의 모자이크는 아담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생명으로 살게 하십니다. 내 존재의 심장부에서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매 순간 숨을 불어넣으시고 존재할 것을 허락하시며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는 고독한 자아나 데카르트식의 끝없는 자기회의에 빠져 있는 에고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으로 충만한 빈 자리가 있습니다.

비어있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로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르는 성전이 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수도승이 받은 가장 궁극적인 부르심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 부르심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할 때 이루어진다는 제 말을 잘 이해하시겠지요. 사실 저는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들이 너무 매혹적이니 여기서 꼭 한 발자국만 더 나가야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는데, 아마도 여러분이 옳을 것입니다.

모든 예술품은 이 세상 첫 창조의 메아리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공허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예술작품 안에서 가장 잘 알아듣습니다. 예술작품의 독창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기원을 가리킵니다. 시, 그림, 조각이나 노래는 창조하는 것이 하느님께 무엇을 의미하는 지 우리에게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죠르지 슈타이너(George Steiner)는 “모든 예술 행위의 깊은 내면에는 무(無)로부터의 절대적인 도약, 그 이전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전대미문의 새롭고 유일무이한 것을 창조하려는 꿈이 자리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특별히 음악에 있어서 이것은 사실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침묵 속에서 탄생하는 음악을 통해 없음(無)으로부터 어떻게 우주가 생성되고 또 우리가 창조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음악에서 듣게 되는 침묵과 소리 사이의 교류는 무로부터 창조된 우주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으로, 곧 ‘있음’으로 흘러들어와 ‘없음’으로 흘러나가는 교류의 현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슈타이너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우리는 음악 안에서 거듭 새로워지는 그 첫 번째 원형의 흔적을 듣습니다. 결코 다가설 수 없는 창조의 순간, 접근할 수 없는 첫 번째 피앗(Fiat)을 듣습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이 거대한 굉음의 울림입니다. 타브너(Tavener)가 말한 신적 침묵의 메아리입니다.

겸손은 수도승 생활의 심장부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우울한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이 피조물임을 알고 자신의 존재가 하느님의 선물임을 아는 사람들의 겸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삶의 중심에는 노래가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은 이 노래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말씀을 노래합니다. 그 말씀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즐거움을 주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을 만납니다. 우리가 창조되었음을, 그리고 늘 다시 새롭게 재창조되고 있음을 경축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창조된 우리 자아의 심장부에 하느님은 당신의 거처를, 당신의 자리를 만드십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빈 자리를, 텅 빈 공허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 케루빔 날개 사이의 빈 공간,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빈 무덤, 엠마우스에서 사라지신 예수님의 자리가 바로 그 텅 빈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특별한 목적 때문에 수도원에 살지 않고, 무엇인가를 쟁취하기 위한 사다리를 오르지 않고, 대신 창조된 존재로서 자신의 본질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사람들이 될 때, 여러분 가운데에 그 빈 자리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원에서 찾기를 희망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의 언어를 피합니다. 신비는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들을 깨뜨립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우리 역시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도원은 침묵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노래의 장소입니다. 우리는 언어의 한계 속에서도, 의미의 가장자리에서도 노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 아우구스티노가 환희의 노래라 일컬은 것이며, 바로 이 희년에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노래입니다.

“여러분은 묻습니다. 환희 속에서 무엇을 노래합니까? 언어는 우리가 마음 깊은데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수확철 포도밭에서 열심히 포도를 거둬들일 때, 사람들은 그들의 기쁨을 가사에 담아 노래하며 포도를 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차고 넘쳐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게 되면, 노래의 일관성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자신들을 그저 그 순수한 노래 가락에 맡겨 버립니다. 이 환희, 이 기쁨의 노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가슴이 언어로는 표현할 길 없는 벅찬 감동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선율입니다. 그러면 이 솟구치는 환성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노래가 아니겠읍니까?”

(코이노니아 제26집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