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잎 <루카 17, 7-10>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있습니다. 가을을 장식한 단풍잎이 땅에 떨어져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나그네의 발길에 밟혀 으스러집니다. 내가 밟고 지나가는 가랑잎 하나하나는 자기 소명을 다하고 “이 몸은 해야 할 일을 다 하였을 뿐 이제 쓸모없는 종입니다.” 말하는 듯합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며 봄바람 불어올 때 앙상한 가지에 봄소식을 앞서 알리려고 솜털 같은 싹이 피어나기 시작한 나뭇잎이 파란 연푸른색을 띠고 나무를 장식하고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어 온갖 생명이 봄기운을 느끼게 하며 나무 엽록소에 태양의 힘을 전해주고 뿌리까지 튼튼히 땅에 서 있게 합니다. 초여름에 시원함을 찾는 사람에게 그늘을 주고, 푸름을 자랑하듯 쉼터를 마련해주고, 모진 비바람에도 나무에 붙어 여름을 지내다가 가을이 오면 먼저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울긋불긋 가을을 장식해줍니다. 그래도 가랑잎은 바람에 날리지 않고 쓰레기 취급을 받지 않고 자기가 붙어있던 나무 밑에 떨어져 뿌리를 덮고 썩어서 물이 되어 땅으로 들어가면 그 나무에 거름이 되어 다음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이같이 가랑잎 하나의 역사는 오늘 복음을 그대로 설명해줍니다.

제때 준비된 먹이가 되고 찾아오는 사람의 쉼터가 되듯이 주인이 음식을 먹을 때까지 시중들고, 자기 일을 다 하고, 아무에게도 인사받지 못하고, 발에 밟히고, 쓰레기차에 실려 불태워 버리는 신세가 되기도 하지만 무익한 종처럼 할 일을 다 하고 사라져갑니다.

우리네 인생과도 같습니다. 희망을 주는 어린이로 태어나 뭇사람에게 사랑을 받지만 자라서 할 일을 하면서 큰 나무란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일하지만, 때가 되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태워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떠나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에 큰 도움을 주고 가게 됩니다. 또한, 나무 밑에 거름으로 남아 있는 가랑잎은 작은 여운을 남깁니다. 오늘 아침 묵상하다가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서서 쓸쓸함을 느끼며 가랑잎을 생각하면서 사람으로서, 신자로서, 수도자로서, 사제로서, 하느님이 은총으로 내려주신 것을 능력대로 다 하고 쓸모없는 종이오나 주님의 영원한 품에 안겨주심을 찬미하고 감사드릴 뿐입니다. 자기 공적에 의미를 두지 말고 무엇을 하든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