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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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30 18:50
사랑의 순교
 글쓴이 : 이석진그레고리오신부
조회 : 128   추천 : 0  

Peter Bae님이 게시: 하늘 길 이 글은 너무나 평신도로써 너무나 좋은 말씀이기에 공유해서 전합니다

어제 오전 7:29 ·

 

+ 사랑의 순교

 

다음 글은 대림시기를 맞아 실시하는 대림 시기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귀한 선물이라는 제하의 대림시기특강원고를 요약한 것입니다.

대림시기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귀한 선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전교구 덕명동성당 신자 배 베드로입니다.

평생을 과학을 하며 살아 온 제가 대림시기에 관련한 특강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송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부님께서 대림시기에 특강을 말씀하셨을 때에 거절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맡겨진 일이라 생각하고 오로지 성령의 도움을 청하면서 준비하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성탄절에 4주간 앞선 주일부터 4개의 초를 한 주간마다 하나씩 어두운 색깔의 초로부터 밝은 색깔의 초로 차례대로 켜 가면서 대림시기를 시작합니다.

4개의 초를 아름답게 장식한 대림환은 가톨릭 신앙인이 아니라 하드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길 만큼 멋이 있습니다.

대림절의 4개의 초는 구약 4,000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대림시기의 기원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4세기 말경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성탄대축일을 앞두고 6주간동안 가톨릭 신자들이 참회의 기간을 가진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림시기가 전례 안에서 본격적으로 거행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이후 로마에서 였으며 그리스토의 재림과 성탄을 준비하는 의미로 대림시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대림시기가 4주간으로 정해진 것은 7세기 초엽 그레고리오 대교황 때부터였습니다.

이와 같이 대림시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 것을 준비하는 시기이며, 세상의 종말에 재림하실 그리스토를 기다리며 언젠가는 올 심판에 대비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토의 재림을 위해 보속과 속죄 등의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기로서 다시 말하면 그리스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기억하고 묵상하면서 기다리는 시기로 생각하면 적절할 것입니다.

때문에 대림시기를 단순히 전례적 의미로 보내는 것은 참으로 잘 못 된 것이며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특별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시기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오시길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 대한 을 알고자 노력하여야 해야 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동정녀로서 주님을 맞으신 것처럼 우리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겸허한 자세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이 가톨릭 신앙인의 도리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토의 자비와 권능에 대한 영광을 찬미하고 꾸준한 기도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할 마음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토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길을 베풀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토를 믿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내어 주시어 피를 흘리게 하셨음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잘 못한 사람이 죄를 뉘우치고 벌을 받아야 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를 막으려는 수단은 될 수 있어도 죄를 없애지는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잘못하지 않은 의로운 사람이 자원해서 희생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정의는 죄를 방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죄를 근본적으로 없애는 길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지혜로우심과 권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으면서도 자원해서 희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믿음과 삶은 그 자체로도 커다란 힘과 권위가 되는 것이며, 그 힘과 권위는 사람들을 일치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어느 공동체에서도 갈등은 있기 마련이며, 좋은 뜻으로 모인 사도직 공동체애서도 그러한 현상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잘못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덜 잘못한 사람, 아주 잘 못한 일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를 따지다가는 공동체의 일치는 허물어질 것이며 평화를 이룩할 가능성은 아예 없어지게 될 것이며, 오고 가는 말들에서 서로간의 상처만 커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하느님 눈에는 도토리 키 재기로 밖에 더 하겠습니까?

너의 죄가 크다, 적다를 따지는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이 얼마나 웃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는 누가 더 큰 죄를 지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누가 먼저 회개하는가, 누가 일치를 위해 희생하는가가 더 큰 관심사일 것입니다.

찢겨지고 갈라진 한 가운데 들어가서 우리들이 스스로 초래한 분열을 씻고 일치시키려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때 교회는 본연의 권위를 찾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희생정신에 바탕을 두게 될 때 더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혹자가 나에게 "얼마나 많이 가졌길 래 나누어 주고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는가?"라고 물어 온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 뿐 생명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다면, 또 가난한 이들의 억눌림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그처럼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희생을 묵상하면서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봉헌의 삶을 묵상하는 시기인 것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가 영성체 후 주님께 간청한 기도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오 주님.

사랑하는 주님.

당신의 향기를 퍼뜨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제 미음을 정신과 사랑으로 채워주소서.

제 존재에 온전히 들고 차지하시어

제가 만난 사람들이 모두

제 안에 깃들인 당신을 느낄 수 있도록

제 안에 머무소서.

사람들이 저를 보지 않고

제 안의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와 함께 머무시어

제가 당신의 빛으로 빛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제 빛으로 밝아지게 하소서.

아멘."

 

영성체 후 빠지지 않고 이와 같이 기도한 것은 자신의 영혼보다 주님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 깃들어 희생을 즐겁게 받아들이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녀 마더 데레사는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함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성녀 마더 데레사를 입에 올립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이 그 분의 삶에 얼마나 닮았을까?"를 생각하면 우리들에게는 부끄러운 마음만 남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좋아 사제가 되었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사제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미사 때마다 신부님께서는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하고 최고의 존대말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목자로서 여러분을 귀한 양으로 보시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신자들은 그냥 막연히 "안녕하세요."라고 답하는 것이 일반적 현실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신부님께서 최고의 존대말로 말씀하신데 대하여 지나가는 이들에게 나 있을 법한

로 대답하는 실수를 무의식중에 그것도 미사 때마다 저지르고 있음을 우리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제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영신적인 아버지십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자식은 "안녕하세요."라고 답한다면 그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안녕하셨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안녕하세요."라고 답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행동은 진정한 가톨릭 신앙인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평생을 통하여 풀밭의 잔디만큼이나 많은 가톨릭 신앙인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불행하게도 신앙을 무슨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착각을 불러 올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를 가끔 보아 왔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얼굴에 미소를 띠고 서로 평화를 빌어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성당에서는 악수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고 코를 비비는 일도 서슴치 않는 경우를 볼 수 도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형제와 자매들의 모습입니까? 서로간의 사랑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성당 밖으로 나와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우리들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인천의 어느 본당에서 있은 경우를 예로 들고자 합니다.

 

미사 후 밖으로 나온 어느 형제가 꼼짝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승용차를 보고 "어떤 개새끼가 이렇게 차를 세워 놓았어!"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성당 입구에서 인사를 나누던 본당신부님께서 이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경우를 본 일이 있습니다.

"40년 사제생활을 통한 사목이 이렇게 밖에 되지 못하였나?"며 탄식하시는 가슴 아픈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평화롭게 해결될 수 있는 일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기 중심적으로 급하게 행동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희생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으로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식을 개새끼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독성죄를 지은 것입니다.

 

희생은 남을 자기보다 더 크게 생각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남에 대한 배려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남의 아픔이 자기 아픔보다 크다고 생각할 때 가능한 것이지 남의 아픔이 자기 아픔보다 작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을 희생으로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남의 아픔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작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별로 오래되지 않은 지난날 집을 나서면 편리하게 무엇이든지 쉽게 구할 수 있는 구멍가게가 이웃에 있었습니다. 이젠 그런 구멍가게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소위 마트가 거대한 자본을 앞세워 우리들 주변에 등장하면서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마트의 거대한 자본은 모두 재벌이라는 돈에 파묻혀 사는 이들의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얼마 되지도 않는 상품을 팔아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는 수단으로, 조금 형편이 나은 경우는 자식 공부시키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 가난한 사람들이 경영하는 아주 작은 가게들이었습니다.

마트의 자본주에게는 자신의 눈썹 하나 쯤 되는 규모라고 하여도 과한 말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경쟁적으로 등장한 마트들은 습관적으로 그 수를 늘려가며 구멍가게의 숨통을 간단히 끊어 놓고 말았습니다. 남의 아픔을 모르는 수전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작태들입니다. 수전노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며 오로지 돈만을 지키는 노예입니다. 어떤 경우는 구멍가게서 10,000원 정도의 닭튀김을 5,000원이라는 가격으로 구멍가게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에게서 무슨 희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마트는 외국의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는 도심을 벗어나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곳에 마트를 내고 있으며 대량구매를 위한 고객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 도심의 구멍가게나 소규모 상권을 결코 침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을 간다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기보다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서울 청담동 어느 미용실의 이야기는 우리를 너무나 서글프게 합니다.

머리 한번 가꾸는데 485,000원을 지불하고 있는 현장을 TV를 통하여 방영하는 경우를 보고는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놀란 사실은 제법 질 좋은 쌀 20포대의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지불하고서 만족해하는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한 달에 네 번 미용실에 온다고 하였으니 거의 2,000,000원을 머리털 가꾸는 것에 지불한다는 것이지요. 1년이면 24,000,000원이 됩니다. 웬만한 중소기업의 과장 연봉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이런 돈을 과연 땀과 노력의 대가로 정당하게 벌었을까요?

아니면 도적질로 벌었을까요? 아마 도적질에 가까울 것입니다.

학생들이 공부해야 될 시간을 쪼개어 아르바이트를 하면 이 정도의 돈을 얼마만한 시간에 받을 수 있을까요? 진실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을 실감하게 하는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희생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태안 앞바다 기름오염사건은 만족하게 해결되었습니까?물론 만족하게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그러면 조금 부족한 정도로라도 해결되었습니까? 그 지역 어민들이 말하

있는 현실은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거대한 재벌이 소유한 한 법인의 실수로 저질러진 일을 책임을 지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보상을 하면 법인이 보상하는 것이지 재벌 자신의 재산을 내어주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의 아픔을 손톱의 때만큼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러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런 요지경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희생정신을 우리들 몸에 담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대림 시기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며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내리는 사랑이며 귀한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귀한 선물을 가장 지혜롭게 받아들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림 첫 주간은 기다림의 자세를 가다듬는 시기로서 며칠 뒤에 오실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대림 두 번째 주간은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시기로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판공성사를 통하여 지난날의 모든 죄를 씻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대림 세 번째 주간은 메시아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기에 기뻐하라고 권고 하는 시기로서 가족과 이웃에게 기쁨을 함께 하도록 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대림 네 번째 주간은 예수탄생을 예고하는 시기로서 가족과 이웃에게 예수탄생을 같이 맞이할 것을 권고하는 시기입니다.

교우 여러분 자기만이 아니고 세상 모든 이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성탄절을 맞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