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20일부터 21일까지 있었던 베네딕도 벗들 엠마오 소풍 후기입니다. 
(후기 작성해 준 배정윤 크리스피노 형제 고마워요.^^)

저도(猪島)의 추억 - 배정윤 크리스피노

오래간만에 수도원 벗들과 함께 한 엠마오. 출발 전날 저녁, 멀리 사시는 벗들 형님에게 연락이 왔다. 왜관역 9시 20분 도착인데, 일찍이 만나 아침이나 같이 먹자고. 그 연락을 받은 후부터 이상하게 맘이 들뜨고 설레어왔다. 반가운 이들과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이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은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설렘을 안고 아침 일찍 맞춰놓은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깨어, 부랴부랴 씻고, 어제 챙겨놓은 짐들을 확인했다. 부모님께 다녀온다고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화창했다. 엠마오 가기엔 더 없이 좋은 날씨였다.

차에 시동을 걸고,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왜관으로 향했다. 일찍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아침 약속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해, 왜관역 앞에서 미리 도착해 있던 형님들을 만나, 김밥과 떡볶이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오래간만에 만나 할 얘기들이 많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갔다.

20대 초중반 벗들 모임에서 만나, 한창 때를 함께 했던 반가운 벗들도 있고, 새로 보이는 파릇파릇한 고등학생까지, 이번 엠마오도 언제나처럼 다양한 이들이 동행했다. 반갑게 인사와 소개를 마치고, 차에 올라 마산 저도 연륙교로 향했다.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차 안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한참을 가다보니, 팜플렛에 적혀 있는 마산 칠서휴게소가 도무지 보이지 않아 결국 상행선에만 있는 휴게소라는 걸 알게 되곤, 바로 눈에 보이는 휴게소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다시 차로 1시간여를 달려 마산 저도 연륙교에 도착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이미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눈에 띄는 ‘콰이강의 다리’ 푯말. 얼핏 어느 영화 제목에서인가 들어본 적이 있던 그 다리.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붙잡힌 영국군 포로들이 태국 ‘콰이강’에 건설한 다리와 비슷해 ‘콰이강의 다리’란 이름을 얻게 되었단다.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뒤로 우리 일행도 가서 섰다. 바닥이 투명유리로 되어 있어, 밑에 물이 흘러가는 게 다 보였던, 그래서 절로 다리가 후들거렸던 그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갔다. 다리 위에서 보인 바다가 시원했다. 내륙지방에서 살다보니 강이나 바다를 볼 기회가 잘 없었는데, 탁 트인 바다와 그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너무도 시원했다. 다리를 건너 비치로드로 향했다. 차를 타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 나오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안내된 길을 따라 마산 저도 섬 한 바퀴를 빙 둘러오는 코스를 출발했다. 

처음엔 옆에 바다도 보였다. 그 바다를 옆에 끼고 걸으니 좋았다. 하지만 점점 길이 오르막으로 변하더니, 심지어는 바다가 잘 보이지도 않는 산길만 계속 나타났다. 요 최근 몇 년간 산행을 해 본 적 없어, 더욱 힘들어하며, 선두를 쫓아 앞만 보고 걸었다. 처음엔 이런저런 대화들로 시끌시끌했던 벗들도 점차 말수를 잃어갔다. 마주쳐 오는 분들은 하나같이 등산복을 입고 계셨다. 말이 비치로드였지, 정작 바다는 군데군데 쉬어가는 포토존에서만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포토존에서 보았던 탁 트인 바다가 너무너무 좋았다.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비치로드에서의 힘겨웠던 산행을 뒤로 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땐, 온 몸에 땀이 범벅, 그대로 가서 씻고 쉬어야 할 듯 했다. 땀냄새 푹푹 풍기며, 과연 수녀원을 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물 한 병을 원샷 하고 늦게 오는 벗들을 기다리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피로가 절로 가시는 것 같았다. 

마침내 녹초가 된 벗들과 저녁식사를 할 식당으로 향했다. 10여명의 벗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큰 불판이 있었다. 한 아저씨가 오더니, 소나무로 숙성시킨 통삼겹살을 무슨 의식하듯, 고이고이 잘라, 삽 같은 걸로 고기들을 굽더니, 급기야 멋진 불 쇼까지 보여주었다. 요란했던 의식 후, 넓은 불판에 10여명의 벗들과 수사님들이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으려니 다소 불편함이 없진 않았지만, 배고팠던 벗들은 고기에 밥까지 볶아 먹고, 디저트로 나온 고구마까지 다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치로드 산행에 땀범벅이었던 내 몸에 고기 냄새까지 진하게 배어, 다음 일정인 트라피스트 수녀원에 가기가 살짝 미안해졌다.

제일 기대되었던 트라피스트 수녀원. 차로 도착하기 전 멀리서 보이는, 누가봐도 수도원 같던 그 산 속 수녀원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는 다시금 설레는 마음이 되살아났다. 조용한 수녀원에 도착해, 수녀원 지도신부님을 만나 뵙고, 간략한 트라피스트 수녀원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금남의 구역, 더더구나 봉쇄 수녀원인 이 곳에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수녀원 건물 앞에서, 영화나 책에서만 보았던 트라피스트 수도복을 입으시고, 환한 웃음으로 벗들을 반겨주시던 수녀님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바깥 세상과 단절되어, 절대 일반인들과는 한 마디 대화도 나누시지 않으실 것 같던 수녀님들께서, 이리 들어오라시며 객실로 우리들을 안내하셨다. 객실에서 죽 둘러앉아 수녀님들께서 내오시는 차를 마시니, 하루 동안의 여독이 싹 다 풀리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카오를 비롯 해외 트라피스트 수도원서 직접 만든 쿠키도 내오셨는데, 하나같이 다 먹으면 저절로 건강해질 것 같은 맛이었다. 수녀님들의 삶과 성소 이야기들을 들으며 하나씩 하나씩 먹으니, 어느새 쿠키가 다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간 수녀님들이 하셨던 말씀과 표정 하나하나가 너무 행복해 보이셨다. 그래서 여쭤봤다. 정말 이 삶이, 지금이 행복하시냐고. 수녀님은 주저없이 환하게 웃으시며 행복하다고 하셨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주저 없이, 그리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삶. 어쩌면 산 속 수도원에 갇혀 답답할 수도 있을 그 삶을, 수녀님들께선 수도원 바깥에 사는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을만큼 진심으로 행복하게 살고 계셨다. 그게 느껴졌다. 잠깐 동안의 대화와 만남이었지만 말이다.

어느덧 기도시간이 되고, 조용히 성당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수녀님 한 분이 제단 중앙으로 나아가셔서 길게 늘어져있는 줄을 몇 번 당기니, 청명하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났다. 그 종소리를 시작으로 끝기도가 시작되었다. 고요한 중에 잔잔하게 들리는 가운데, 문득 바깥에 개구리 우는 소리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맨 앞자리에 앉으니, 수녀님들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눈에 다 보였다. 왼편에서 너무도 평온한 표정으로 시편을 노래하시던 수녀님 한 분이 자꾸 눈에 띄었다. 그 분의 표정과 수녀님들의 음성, 잔잔하게 깔리는 개구리 우는 소리까지, 마치 천국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기도 중에 수녀님들의 노랫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게 들려왔다. 옆에서 어느 벗님의 훌쩍이는 소리까지 들리니, 그 소리가 더더욱 슬프게 들렸다. 황홀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기도가 끝나, 수녀님들이 주시는 한 아름의 선물을 안고 어둑어둑한 밤길을 달려 숙소인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오며가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대화가 부족했던지, 돌아와서 깨끗하게 씻고, 상원관 휴게실에 모여 반가운 벗들과 또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벗들 모임의 매력이 이런 것 같다. 서로 안 지 얼마 안되는 벗들과도, 이토록 쉴새 없이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신앙을 얘기하고, 자신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것. 바깥에서 성당활동을 오랫동안 함께 했던 이들과도 차마 하지 못했던 얘기를 여기선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 바깥에선 말을 하는 게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아, 이런저런 마음들을 숨기는 데 익숙했고, 말을 줄이는 게 미덕이었던지라, 말을 잘 하지 않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이야기만 했었는데, 여기만 오면 내가 평소와는 다르게 수다쟁이가 되어 버린다. 묘한 벗들모임만의 매력. 헤어나올 수가 없다.

부족하고 모난 나를 언제나 높여주고, 보잘것없는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항상 있는 곳. 수많은 얘기들을 해도 모자르기만 한, 내 영혼의 벗들이 언제나 함께 하는 곳. 수도원 상원관에서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다가, 새벽 3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이번 달은 수도원에서 기도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이 아침기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침기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지 했는데, 눈을 떠보니 새벽 6시 반이었다. 이미 기도시간에는 늦은 것이다. 아침식사는 꼭 해야겠다 싶어, 부랴부랴 일어나 씻고, 나와 마찬가지로 한밤 중이던 다른 벗들을 다 깨우고 아침식사를 하러 객실 식당으로 갔다. 이 피곤한 와중에도 아침기도를 참석한 벗들도 있었다. 

아침식사하면서 또 피정 와 계시던 반가운 벗들 누님도 뵈었다. 그 누님과, 오래간만에 만난 벗들과 또 얘기하느라 한참을 식당에서 보내고, 식당을 나와 다른 벗들과 초 공방에 들어가 미사 전까지 초 공방 수사님께 차를 얻어 마시며, 또 이런저런 좋은 말씀을 들었다. 하나같이 주옥같던 말씀들이었다. 주님의 뜻에 순명하며 “예, 아멘!” 응답하라시던 초 공방 수사님의 긴 강의를 듣고, 미사에 참례했다.

어제 마산으로 출발할 때부터 시작해 지금 미사를 드리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늘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셨던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 벗들모임에 참가한 모든 벗들과 여기 계신 수사님들께서 언제나 주님 안에서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더불어 기도드렸다. 어제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뵈었던 수녀님들의 환한 미소처럼.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미 수도자로 살고 계시는 야곱 수사님의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트라피스트 수녀님들 뵙고 보니, “다시 태어나도 수도자로 살고 싶다.”던 그 말씀을 말이다. 수도자가 같은 수도자를 보고 느낀 그 진심어린 고백이 내 마음에도 와 닿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고, 오히려 넘치게 가득 부어 돌려받은 엠마오 산보. 부활하신 예수님은, 동행한 벗들과 수사님들 안에서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계셨다. 세상이 험해도, 언제나 서로를 의지하고, 토닥여줄 수 있는 이들과 늘 함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