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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14 13:41
덕원의 순교자 32 : 루치우스 (콘라드) 로트(Lucius Roth) 신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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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드(루치우스 신부) 로트는 1890년 뷔르쯔부르그 교구 베르머릭스하우젠 본당 구역의 바이흐퉁엔에서 부친 이시도르 로트와 모친 카타리나 라이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콘라드의 가정은 신심이 깊은 성가정이었다.

콘라드의 신앙심과 재능을 본 게오르그 될링 폰 뢰리트 보좌신부는 그에게 개인 교습을 시켜 18개월 만에 김나지움 4학년까지의 과정을 준비시켰다. 19148월 보좌신부는 콘라드를 성 루드비히 암 마인 수도원의 장상에게 위탁하였다. 그 다음 즉시 콘라드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김나지움을 다녔고 귄츠부르그에서 졸업시험(Abitur)을 쳤다.

19099월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루치우스(Lucius)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했으며 19101016일 첫 서원을 하였다. 콘라드는 재능이 뛰어났고 자신의 수도성소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므로, 장상들은 그를 로마로 보내 성 안셀모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했다. 그는 19131016일 종신서원을 하고 191475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에우제니오 파첼리 교황대사는 뮌헨 교황대사관에서 일할 비서와 보좌관을 찾고 있었는데 루치우스 신부가 보좌관으로 선택되었다. 교황대사는 1924년까지 뮌헨에 머물러 있던 루치우스 신부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루치우스 신부는 보좌관의 임무를 완수한 후 1924817일 한국으로 파견되어 대목구좌였던 원산 본당과 선교기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1930년 덕원 수도원의 원장과 부감목이 되었으며, 곧이어 신학교 교수도 겸임하였다. 이 신학교는 전국의 사제 양성 본부로서 그 명성을 얻고 있었다. 루치우스 로트 신부는 지도력을 갖춘 수도자들 중 하나였으며 헌신적으로 책임감을 갖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 역할을 194959일 막을 내렸다. 정치보위부원은 밤 11시 수도원에 난입하여 루치우스 로트를 평양 감옥으로 끌고갔다.

루치우스 신부는 감옥에서 몰래 보낸 편지를 통해 19501015일에 내려진 선고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6월에(1949?) 루페르트 신부가 72일 용흥에서 한 마르크스에 대한 강연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1015일 선고가 내려졌다. 아빠스님, , 루페르트 신부, 요셉 수사, 그레고르 수사는 각각 5년 형을, 그레고르 신부와 다고베르트 신부는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 모든 것은 소위 나쁜 사상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는 같은 편지에서 계속 적고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심문받은 적이 없고, 그래서 우리를 변호할 수 없었노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재판장은 며칠 내에 그것을 알아보겠다고 얘기했으나 지금까지 한마디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선고는 5분 만에 오직 한 명의 시장만이 참석한 가운데 내려졌다. 51일까지 우리의 활동은 다음과 같다. 낮에는 땅바닥에 앉아 있고 밤에는 땅에 누웠다. 책도 없었고 기도서도 없었지만 많은 기도를 바쳤다. 우리끼리 서로 이야기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195010월 유엔군이 진격해오자 북한군은 퇴각을 시작했다. 평양 감옥의 수감들은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루치우스 신부는 1950103일과 4일 밤에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