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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4-14 13:37
덕원의 순교자 31 : 안셀름 (요셉) 로머(Anselm Romer) 신부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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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안셀름 신부) 로머는 1885127일 로텐부르그-슈투트가르트 교구의 잉어킹엔에서 아버지 울리히 로머와 어머니 루이스 콥프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7년간 다닌 후 개인 교습을 받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김나지움과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딜링엔에서 김나지움 졸업시험(Abitur)을 통과하고, 1906929일 수련기를 시작하면서 안셀름(안셀무스 Anselmus)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안셀름 신부는 19071020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첫 서원을 하고, 딜링엔에서 철학, 그리고 로마의 성 안셀모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191111일 종신서원을 하고, 같은 해 53일 막시밀리안 폰 링 주교에게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9111030일 서울로 선교 파견된 안셀름 신부는 1921년부터 서울 수도원 신학교의 교장 직무를 수행했는데, 신학교의 성장과 발전은 그의 인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원산이 대목구가 되고 난 후, 안셀름 신부는(서울 수도원 원장으로서) 대목구 부감목에 임명되었다. 그는 194959일 체포될 때까지 덕원 신학교를 열정적으로 그리고 유능하게 운영하였다. 안셀름 신부는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 잠시 머문 후 전천의 옥사덕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영양실조와 동상으로 1951119일 사망하였다,

 

강제 수용소의 수녀 의사 디오메데스 메퍼트의 증언

안셀름 로머 신부도 처음부터 나의 단골 환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선천적으로 허약하고, 덕원 신학교의 교장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으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는 3개월간의 감옥생활로 매우 쇠약해졌다. 그도 나중에는 점차로 수종이 뒤따르는 설사를 앓아서 쉬운 일을 하는 일꾼에 편입되어야 했는데 이는 안셀름 신부를 고통스럽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는 옥수수를 벗기거나 산에서 섶나무를 하거나 부엌일을 돕는 등 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때를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들에서도 힘이 닿는 데까지 때때로 함께 일했다. 만포 시기는 그의 건강을 매우 나쁘게 했으며 심장도 매우 약해졌다. 심한 동상도 그를 괴롭혔다. 수용소로 돌아온 다음 그는 다시 약간 소생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심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을 해주곤 했다. 그는 신학교에서 일하기 위해 기꺼이 다시 덕원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는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고 종종 웃으면서 질문을 했다. “수녀님, 당신은 예언을 할 수 없습니까?” 1951년 가을, 그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고 그 자신이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 짐작되는 자기 죽음의 날짜를. 그는 우리에게 멋진 강론을 많이 해주었는데,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는 제대 앞에 앉아 성스러운 묵주에 관한 마지막 강론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죽음을 준비했다. 여리고 섬세한 심성으로 인해 그는 병과 이러한 원시적인 상황에서 오는 충격과 절망감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가 고집을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나의 간호를 받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19일 밤 1시경에 그는 나를 불렀고 곧 평온하게 사망했다. 안셀모 신부는 수용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없다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정말로 덕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