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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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4 15:49
[세상에 빛을⑪] 덕원 수도원⑤ 덕원 수도원 공동체 - 성인품에 오르소서!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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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5월 성령강림대축일을 맞아

덕원 수도원 공동체를 찾은 경성대목구장 라리보(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 주교와 함께

보니파시오 사우어(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주교아빠스 등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 회원 가운데 덕원 수도원 수도자들 상당수가 공산정권에 희생됐고,

일부만이 살아 남아 본국으로 송환됐다가 훗날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다.

 

 

 

▲ 일제 강점기 중 덕원수도원에 파견됐다가

1949년 5월 공산정권에 체포돼 옥사덕 수용소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수도자들이

1954년 1월 본국으로 송환된 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모원에 모였다.

해방 이후부터 수복 때까지 덕원 수도원 사진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수도원 폐쇄와 함께 대부분 불태워지거나 파쇄됐기 때문이다.

 

 

▲ 전쟁 중 폐허가 된 덕원 수도원 성당.

1949년 5월 11일 수도원을 접수한 공산 정권은

수도원 건물을 개조, 농과대학(현 원산농업대학)을 설립했다.

원산 수복 뒤 덕원 수도원을 찾아간 임화길(안드레아, 함흥교구 소속)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 집무실을 제외한 모든 수도원 건물이 방화로 전소된 상태였다.

 

 

▲ 1921년 11월 1일 서울 수도원에 원산대목구 소신학교를 설립할 때부터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이 강제 폐쇄될 때까지 신학교 교장을 맡았던 안셀모 로머 신부.

수도원 폐쇄 전날인 5월 10일 밤 11시에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끌려간 로머 신부는

평양 인민교화소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11월 9일 압록강변 옥사덕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 1950년 10월 10일 원산이 수복된 뒤 원산본당 공동체가

원산성당에서 미군들과 함께 전쟁 중에 희생된 이들을 위해 죽은 이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앞줄 맨 왼쪽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바치는 이가 덕원병원에서 일했던 김재환(플라치도) 수사다.

6ㆍ25전쟁 중에 원산성당은 북 인민군 사령부로 쓰였다.

 

 


   "…그때는 먹을 것도 항상 부족했고, 일은 일대로 말도 못하게 고돼 '

그저 이렇게 살다가 한 명 한 명 죽어가겠지' 각오하며 살았어요. 밥도 항상 모자랐어요.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으려고 눈이 벌겋게 됐어요.…

그래도 그때가 제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에요. 정말 열렬히 하느님을 찾았고,

서로서로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몰라요.

돌이켜보면 옥사덕에 살았던 시기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시간이었어요."

 

 1951년 1월부터 3년 반 동안 옥사덕 수용소에 수용됐던 마지막 생존자

베트비나 카이사르(한국명 채인숙,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수녀의 회고가 찡하다.

(계간 「분도」 제5호 2009/봄)

 

 수난은 '참혹했다'.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병자들이 속출했다.

극도로 쇠잔해 하나둘씩 병석에 누웠다. 한숨과 탄식이 그치지 않았다.

"고생 끝에 우리보다 앞서 저 언덕 위 무덤에 묻힌 동료들이 한없이 부러웠다"는 고백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수난을 가시밭길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꽃자리'로 여겼다.

끝없는 굶주림과 중노동, 추위도 하느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을 끊지는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수난은 해방과 함께 시작됐다.

8월 22일 소련군이 원산에 진주하면서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혹독한 수난'을 겪는다.

이에 앞서 8월 12일 나진과 선봉을 점령한 소련군에게

비트바르 파렌코프(당시 회령본당 주임) 신부가 피살된 것이 시발이었다.

 

 가뜩이나 일제 말부터 전쟁물자 수탈과 선교사 추방,

신사참배 강요로 어려움을 겪던 덕원수도원은 공산정권의 '반종교 투쟁'으로 곤경에 빠진다.

특히 1946년 3월 5일 발효된 '북조선 토지 개혁령'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이 조치로 덕원수도원은 건물과 대지를 제외한 모든 토지를 몰수당하고 5헥타르(1만5125평)만 남았다.

 

 반종교 투쟁은 소련군 진주와 함께 막이 올랐다. 모든 주민은 종교를 밝혀야 했고,

그 내용은 외출시 꼭 지녀야 하는 신분증명서에 기재됐다.

모든 종교인은 직장과 관청에서 차별대우를 받았고,

'반동 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공직에서 추방됐다.

모든 공장과 학교에서 '사상교양사업'을 통해 유물론을 가르치고 반종교선전을 했다.

 수도원 또한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인민재판식 규탄을 받아야 했다.

그 와중에 덕원수도원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북한 공산정권은

1948년 말 정치보위부에 수도원을 몰수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우선 그해 12월 1일 수도원 당가(경리책임자) 다고베르트 엔크 신부가

포도주 불법 제조 및 탈세 혐의로 체포됐고,

1949년 4월 28일 덕원인쇄소 책임자 루드비히 피셔 신부가 '불온물 인쇄' 혐의로 체포됐다.

이는 수난의 서막에 불과했다.

 

 한 달 뒤인 5월 9일. 북한 정치보위부는 72살 고령에 와병 중이던 사우어 주교아빠스를 비롯해

루치우스 로트(덕원수도원장) 신부, 아르눌프 쉴라이허(덕원수도원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사이즈(덕원신학교 철학 교수) 신부 등 4명을 체포, 투옥했다.

 

이튿날 밤 11시, 정치보위부원들은 또 다시 수도원을 침입, 안셀로 로머(덕원신학교 교장) 신부 등

독일인 신부 8명과 수사 22명, 한국인 김치호ㆍ김종수ㆍ김이식ㆍ최병권 신부 등 4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를 비롯해 만포 인민교화소, 관문리 수용소,

옥사덕 수용소, 함흥 인민교화소 등에 수용됐다.

또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 등 99명을 내쫓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전격 몰수했다.

 

 이 무렵, 원산ㆍ고원ㆍ고산ㆍ영흥ㆍ흥남ㆍ함흥본당에서도

신부와 수사들이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다.

6ㆍ25전쟁 발발 직전까지 교회를 돌본 이재철ㆍ김봉식ㆍ이춘근 신부 등도

전쟁 직전 체포돼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이로써 22년간 함경도 일원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덕원수도원은 완전히 폐쇄된다.

 덕원수도원을 비롯해 원산, 고원 등지에서 체포 투옥된

외국인 신부와 수사, 수녀 67명은 평양인민교화소 등에 갇혔다가

옥사덕 강제수용소로 이송되는 등 4년간 수난을 겪어야 했다.

1950년 10월 '죽음의 행진'과 힘겨운 중노동으로 25명이 희생됐고,

단지 42명 생존자만이 1954년 1월 12일 본국으로 송환됐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이처럼 피를 흘린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2007년 5월 10일 '하느님의 종 신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토와 동료 순교자들'

36위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 반포와 함께 청원인을 임명하고 시복 작업에 공식 돌입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평화신문 2009. 08.30 발행 1033호 [세상에 빛을]-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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