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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4 15:46
[세상에 빛을⑧] 덕원 수도원② 한반도 북부 ''사제 양성 요람'' 덕원신학교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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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신학교 신학생들은 원산대목구와 연길지목구 출신이 주축을 이뤘고,

평양지목구 신학생도 덕원신학교에서 수학했다.
초기엔 지원자가 적어 격년제로 2년마다 한 번씩 신입생을 선발했으나,

1941년부터는 해마다 입학 전형을 실시해 신학생을 뽑았다.
과정은 초창기 14년간 수업하던 것과 달리 후일엔

중등과 5년, 고등과 2년, 철학반 2년, 신학반 4년 등 총 13년이었다.
해마다 9월 초에 새 학기를 시작해 이듬해 7월 10일께 한 학년을 마쳤다.
사진은 만국기가 내걸린 교실에서 신학생들이학업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 덕원신학교에선 신학생들이 관현악단을 구성,

각종 종교음악회와 축일 및 대축일 행사, 운동회 등에서 연주를 맡았다.
때로는 원산 해성학교 관현악단과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사진은 1934년 관현악단 지휘를 맡았던
피셔(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수사신부가

관현악단 단원 25명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으로,

피셔 신부는 교회음악에 조예가 깊어 1938년 7월 20일 「가톨릭 성가집」을 내기도 했다.

 

 

▲ 식사를 하고 있는 덕원신학교 신학생들.

앞쪽에는 교수신부가 앉아있고, 그를 중심으로

세 줄로 배치된 식탁에서 신학생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

 

 

▲ 덕원신학교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학무부에서

공식 인가를 받은 것은 1935년 2월 10일의 일이다.
신학교는 그해 5월 14일 공식 개교식을 가졌고,

사진은 이 때 덕원신학교 교수진과 신학생들,

함남 교육국장, 덕원군수, 원산경찰서장 등이 함께한 가운데

덕원수도원 현관에서 찍은 개교 기념사진이다.
덕원신학교는 총독부에서 공식 인가를 받았기에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총독부에서 내려진

무허가 학교 폐쇄 조치에도 불구하고 존립할 수 있었다.


 

▲ 1936년 6월 7일 연길지목구 출신인 김충무(왼쪽)ㆍ한윤승 부제가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사제품을 받은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덕원신학교가 배출한 첫 사제였을 뿐 아니라 연길지목구 사상 첫 사제이기도 했다.

 


   덕원신학교는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에게 '덕원의 보석상자'였다.

 

수도원에서 200m 가량 떨어진 1199㎡(363평) 크기 땅에

말 편자 형태 'ㄷ'자 2층으로 지어진 소박한 신학교였지만,

덕원신학교가 한국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를 이룰 '미래 씨앗'이라고 여겨서였다.


 베네딕도회 공동체가 이렇게 아낀 덕원신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27년 12월 1일 함남 덕원군 북성면(현 강원도 문천시 덕원면) 어운리에서다.

예수성심신학교(1887년 개칭, 1855년 개교한 성요셉신학교 후신),

성 유스티노신학교(1914년 10월 개교)에 이어 세 번째였다.


 하지만 그 뿌리는 서울 백동 신학교에 두고 있다.

1920년 8월 원산대목구가 설정되자 베네딕도회는

이듬해 11월 1일 서울 수도원에 소신학교를 설립한다.

이 신학교가 1927년 덕원으로 옮겨가 덕원신학교가 됐다.

수호자 이름을 따 '성 빌리브로르도 신학교'라고도 불린 덕원신학교는

원산대목구와 평양(1927년 설정)ㆍ연길(1928년 설정) 지목구 사제 양성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과정 연한은 서울신학교와 마찬가지로 예비과 2년에 중학교 6년(이상 소신학교),

철학반 2년, 신학반 4년(이상 대신학교) 등 총 14년이었다.

1928년 9월 새 학기를 시작했을 때 63명이 입학,

이 가운데 4명이 1929년 9월 철학반에 들어갔다. '덕원대신학교'의 출범이었다.

안셀름 로머 교장신부를 비롯한 사제 5명과 한국인과 일본인 평신도들이

철학과 물리학, 라틴어, 교리, 교회사, 국어, 한문, 동양사, 일본어, 수학 등을 교육했다.

신학반이 생기며 교리신학과 성서신학, 윤리신학, 교회법, 사목신학,

전례학, 교부학, 교리교수법, 설교학 과정이 새로 개설됐다.


 신학생들의 하루 일과는 엄격했다.

매일 새벽 5시 15분에 기상해 밤 9시까지 미사와 자율학습, 수업,

노래ㆍ체조ㆍ독서, 묵주기도 등이 톱니바퀴 물리듯 이어졌다.

꽉 짜인 일정에도 신학생들은 하루 30분씩 주어진 자유시간을 이용해

축구와 테니스, 주사위, 윷놀이, 장기를 즐겼고, 일각에선 하모니카를 불거나 풍금을 쳤다.

1934년께에는 신학생 관현악단도 생겨났다.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교수신부들은 "마치 집시(Gypsy) 가족들 같았다"고 회고한 기록이 남아 있다.


 덕원신학교는 1936년 6월 7일 최초로 사제를 배출한다.

김충무ㆍ한윤승 신부가 그 주인공으로, 둘 다 연길지목구 출신이다.


 원산대목구 출신으로는 임화길ㆍ김보용 부제가 1938년 3월 21일 사제품을 받았고,

연길대목구(1937년 4월 대목구 승격) 출신 신윤철 부제도

같은 날 함께 사제품을 받았으며, 이후 계속 사제를 배출한다.


 그러나 아픔도 겪어야 했다. 1938년 9월 23일 덕원신학교는 화재로 전소된다.

이에 평양대목구(1939년 7월 대목구 승격)에서 착수금을 빌려

재건축에 들어가 네덜란드 보험사에서 받은 보험금 16만 마르크로 복구공사를 하고

그해 12월 26일 새로 입주한다. 이때 덕원신학교 건물은 한 층이 더 올라가 3층이 됐다.


 

1936년 첫 사제 배출…1949년 공산당에 건물 몰수돼 폐교

 


 이처럼 빛나는 역사를 간직한 덕원신학교는 그러나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수난을 겪다가 4년 뒤인 1949년 5월 신학교 건물이 공산당에 몰수됨으로써 폐교되기에 이른다.

덕원으로 신학교가 이전한 지 22년 만이었다. 이 신학교 건물은 현재 원산농과대학 축산학과로,

수도원은 원산농대 본관으로 각각 쓰여지고 있다.


 1937년에 소신학교에 입학, 13년간 덕원신학교에 다닌 윤공희(전 광주대교구장) 대주교는

"1940년대 초 당국 인가를 받지 않았던 예수성심신학교와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일제 압력으로 일시 폐교되자 덕원신학교는 한때 한국교회에서 유일한 신학교였다"며

"13년간 우리를 그리도 사랑해 주신 로머 교장신부님이

1949년 5월 공산당에 끌려가시던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늘 반성하며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술회했다.

 

 

사진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평화신문  200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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