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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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09-04 15:41
[세상에 빛을③] 서울 수도원② 가톨릭고등교육기관 숭공ㆍ숭신학교
 글쓴이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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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 3월 10일 설치된 서울 명동대성당 강론대 천개(天蓋, 강론를 보호하는 뚜껑) 곁에서

숭공학교 목공부 학생들과 수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고딕양식으로 제작한 이 강론대는 당시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

주교수품 25주년 은경축을 축하하기 위해 숭공학교 목공부에서 '깜짝 선물'로 제작,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이름으로 선물했다.
하지만 이 강론대는 아쉽게도 1979년 12월 1일 철거돼

이 중 일부 자재는 독서대로 만들어져 혜화동성당에 설치됐고,

계단 일부는 아직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보존돼 있다.
천개 부분은 현재 명동성당 교구장좌 위에 상징적으로 부착돼 있다.

 

 

 

▲ 당시 명동성당에 설치된 강론대 전경이다.
강론대와 계단, 천개가 모두 드러나 있는 사진으로,

이 강론대는 숭공학교 목공부에서 제작한 강론대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 1912년 숭공학교 학생들이 수도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당시 철공장을 책임지고 있던 힐리리오 호이스 수사이고,

왼쪽에서 일곱 번째가 목공부를 맡았던 일데폰스 플뢰칭거 수사다.
1913년부터 목공부 책임을 맡은 일데폰스 수사는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독일 쾰른 가구공장에서 일을 했던 경험이 있는 가구공으로,

함석과 자물쇠를 만드는 일에 능통했고 건축 일에도 능숙했다.
특히 학생들을 위해 연장을 만드는 일을 좋아한 일데폰스 수사는

목공장 실습장은 물론 목공장 연장까지도 직접 제작했다.

 
 


 

▲ 숭공학교 제차부 게르만 하르트만 수사와 학생들이 시동을 걸어 시험운행을 해보고 있다.
1914년에서 1919년 사이에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당시 숭공학교 제차부에서는 차량 부품을 수입해 조립한 뒤

엔진 덮개나 좌석 지붕 등 외장을 씌워 시중에 판매 쏠쏠한 수익을 올렸다.
차량 모습으로 보면, 1908년에서 1927년까지 생산된 미국제 T형 포드 엔진과

바퀴, 차체 등 주요 부품을 수입해 조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 1911년 9월 16일 개교한 2년제 사범학교 숭신학교 재학생과 수도자, 교사들.

초대 교장 안드레아 엑카르트 신부와 가시아노 니바우어 신부,

한국인 교사 2명, 일본인 교사 1명이 강의를 맡았다.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엑카르트 교장 신부, 보니파시오 사우어 서울수도원장 신부,

가시아노 니바우어 신부이고, 수도자 왼쪽과 오른쪽이 한국인 교사 2명이며,

앞줄 오른쪽이 일본인 교사다. 학생 수는 20명.

 
   

   "성 베네딕도회 아들들을 한국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인은 일본의 교육활동에 고무돼 교육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학교를 위한 교사 양성, 한국인 수도자 및 성직자 양성, 실업교육이

앞으로 당신들이 해야 할 광범한 활동분야입니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09년 3월 5일자로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깊은 사의를 표시한다.

 

 서울 성 베네딕도수도원은 1910년 9월 4년제 실업학교 '숭공학교'를

수도원 내에 설립, 한국인 실업교육에 첫발을 내딛는다.

학교 이름은 '기도하고[崇] 일하라[工]'베네딕도회 영성 이념에 따라 '숭공'으로 정했고,

기능교육과 함께 제도(製圖)와 한문, 일어, 수학, 교리 교육을 병행했다.

우선 목공소와 철공소를 개설했고, 모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원조로 소목공소도 세웠다.

 

 이후 꾸준히 성장한 숭공학교는 학생 수를 증원하고자 교사 증축계획도 세웠다.

작업장도 대ㆍ소목공부, 자물쇠 제작부, 양철부, 페인트부, 제차부(製車部) 등으로 세분화됐고,

부설 원예부는 장차 농업학교로 발전시킬 계획이었다.

특히 목공부는 당시 교회에서 제대와 촛대, 세례대 등을 주문 받아 제작했고,

숭공학교 제작품으로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1915년에 제작한 서울 명동성당 강론대(1979년 철거)가 있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숭공학교 발전 계획은 다 틀어진다.

수사 4명이 중국 칭타오 독일군 진지로 동원돼 신입생 모집이 중단됐고,

독일에 대한 일본 선전포고로 숭공학교는 재산상, 운영상 위협을 받게 됐다.

수도회는 이에 따라 1918년 6월 학교 경영권을 '형식상' 뮈텔 주교에게 넘기고,

학교 운영 및 재산권을 보장받았다. 게다가 1920년 8월 5일 원산대목구가 설정돼

베네딕도회가 이 지역을 맡게 되자 숭공학교 운영은 더 어려워졌다.

그 뒤 1921년 11월 수도원 구내에 소신학교가 설립되자 소신학생들과 건물을 같이 쓰다가

결국 1923년 6월 30일 폐교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일제강점하에서 13년간 운영된 숭공학교는

한국에서 근대식 실업교육을 실시한 첫 천주교 교육기관으로서 그 의미가 있다.

 숭공학교가 개교한 지 꼭 1년 만인 1911년 9월 설립된 숭신(崇信)학교는 2년제 사범학교다.

사범학교 설립은 성 베네딕도회를 한국에 초청한 뮈텔 주교의 원의였다.

교사는 수도원 내(현 가톨릭대 신학부 자리)에 있었고,

종교학과 윤리학, 교육학, 한국어, 한문, 일어, 세계사, 지리,

수학, 박물학, 음악, 미술, 체육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한국인 교사 양성을 원치 않았던 일제는

사범교육을 독점하고자 탄압을 가했고,

설상가상으로 1913년 지원자가 6명밖에 되지 않아

수도원은 그해 9월 1회 졸업생만을 배출하고 문을 닫았다.

폐교 뒤 학교 건물은 숭공학교 건물로 전용됐다.

 
 
사진 제공=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오세택기자 sebastiano@pbc.co.kr
전대식 기자 jfaco@
[평화신문 2009.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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