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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10-08 11:38
베네딕도회의 아빠스에 대해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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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드러나는

목자, 의사, 청지기로서의 아빠스 모습

 

 

가. 아빠스 명칭의 기원

 

아빠스라는 칭호는 12명 이상인 수도승 공동체의 최고 장상을 말한다. 성 베네딕도는 RB에서 수도원의 장상을 ‘쁘리오르’ (prior, 선배) 또는 ‘마요르’ (major, 어른 연장자)라는 말로 가끔 사용하지만 통상적으로 ‘아빠스’ (Abbas)라는 말로 부른다. 이 용어는 하느님을 부를 때 쓰인 성서 용어로서 아버지란 뜻인 히브리어 '압' (ab)의 시리아어 형태인 ‘아빠’ (abba)에서 나왔다. 이집트의 옛말인 콥트어에서는 ‘아파’ (apa)인데 그리스말과 라틴어로 음역이 되고 변화를 거쳐 명사 ‘아빠스’(abbas)가 되었다.

 

이 용어가 시작된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원래 ‘아빠’란 칭호는 존경과 경애의 칭호로서 지혜에 있어서 연장자나 성덕에 뛰어난 수도승을 영적 아버지로 부를 때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 칭호는 기원적으로는 수도 공동체를 다스리는 장상에 대한 호칭이 아니었다. 이 칭호가 동방 교회에서 서방 교회로 복잡한 단계를 거쳐 알려지면서 ‘아빠스’라는 명칭은 점차 수도원의 장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아빠스는 비교적 오래된 수도승 수도회들, 곧 베네딕도회, 가말돌리회, 시토회 (트라피스트회)에서 최고 장상을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나. 초기 수도생활에서 본 ‘영적 아버지’와 장상

 

4세기 수도생활이 시작된 이집트 사막 은수 생활에서 수도 공동체는 명망과 삶의 지혜가 있는 영적 아버지인 ‘아파’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아파가 먼저 있었고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의 무리가 있었다 (성 안토니오, 성 빠코미오).

 

그렇지만 성 바실리오를 시작으로 후대에 생겨난 수도 공동체는 사막 은수자의 공동체와는 달랐다. 공동체들이 먼저 있었고, 그 후에 적합한 조직과 관리체제를 모색하였다. 결과적으로 진행 방향이 반대로 되었고, 장상이 공동체를 이루어나가기보다는 장상은 공동체의 산물이었다. 그 결과 영적 아버지의 개념은 이집트에서 당연히 여겼던 그런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지 않고 그리스도인 친교라고 하는 신약 성서적 이상에 바탕을 둔 공동체 자체가 훨씬 더 두드러져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영적 자녀의 양성에서 카리스마적인 원로와 그 역할이 관심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장상이 말과 모범으로 가르친다는 점에 유의한다. 하지만 은수 공동체나 후대의 수도 공동체나 모두 복음의 순수한 원천에 근거하기 때문에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vices Christi)로서 목자, 의사, 청지기

 

아빠스란 정확히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 답을 알기 위해서는 아빠스란 이름 자체에 대해 알아보고 이 이름의 역사는 베네딕도가 따로 요약해 둘 만큼 매우 길고 복잡하다. “수도원을 돌보기에 적합한 아빠스는 항상 그의 호칭을 기억하여 행동으로써 으뜸이란 명칭을 채워야 한다. 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어지며 그분께 바치는 호칭으로 불린다" (RB 2,1-2). 매우 엄청난 내용이다. 이 이름은 하느님 자신, 특히 성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베네딕도는 ‘제2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기를 바라고 신자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것과 똑같은 위치를 수도원 안에서 차지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 베네딕도는 ‘스승의 규칙서’ (RM)에서 아빠스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RM에서 아빠스를 주교와 같은 신성하고 교계적인 직책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수도 공동체의 동등한 형제들 가운데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로 바라본다. 베네딕도는 어떤 형제를 아빠스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 그렇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RB 63,13). 여기서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신앙이 요구된다.

 

수도원에 아빠스가 없으면 회수도승들이라 할 수 없다. 아빠스만이 가슴에 차고 있는 십자가는 명예나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를 친히 지고 수도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사실 아빠스가 다른 사람들보다 인간적으로 또는 그리스도인으로 뛰어나다 하여 뽑히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주어지는 명예는 수도 공동체의 중심에 서서, 믿음에서 으뜸이 되고, 애덕에서 으뜸이 되며, 충실함에서 으뜸이 되고, 특히 섬김에서 으뜸이 되는 것이 그의 직무라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다 (마르 10,45). 또한 그리스도 친히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따라서 아빠스는 눈에 안보이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므로 무엇보다도 공동체, 아니 형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봉사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베네딕도가 규칙서에서 말하는 아빠스는 자기 수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표지요 희망의 표지가 되는 사람이다. 섬김의 영성에서 아빠스는 목자로서, 의사로서, 그리고 청지기로서의 기능을 한다.

 

아빠스는 말과 행동으로 이 기능을 수행한다. “아빠스의 이름을 받게 되거든 두 가지 가르침으로 제자들을 지도해야 할 것이니, 즉 모든 좋은 것과 거룩한 것을 말보다는 행동으로써 보여줄 것이다. 능력있는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계명을 말로써 설명하고, 마음이 무딘 자와 우둔한 자들에게는 실제 행동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빠스는 자기가 제자들에게 부당하다고 가르친 바는 무엇이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써 가르칠 것이다 (RB 2,11-13). 목자요 의사요 청지기로서 아빠스가 수도형제들을 가르치고 실제 행동으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원” (RB 머리말 45)으로 점차 변모해 나간다.

 

그리고 수하 형제들은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아빠스와 형제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게 된다 (RB 72,10-12 참조).

 

1) 목자 (pastor)

 

베네딕도가 사용하는 첫 번째 이미지는 바로 그리스도 중심적 언어에서 유래한다. 바로 목자가 그것이다. 참된 착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르면 목자에 관한 성서적 이미지는 세 가지 모습으로 표현된다. 곧, 어깨에 길 잃은 양을 메고 서 있는 목자, 푸른 풀밭으로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자,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양들을 모아 위험에서 보호하는 목자이다. 이 세 가지 모습에서 전부 같은 설명이 따라 붙는다. 즉, 목자가 양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양들이 목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떼를 이끄는 목자로서 아빠스는 수도원의 리더(leader), 곧 지도자를 말한다. 수도원에서는 회원들에게 맞는 적절한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원장, 당가, 수련장, 소임지 책임자 등) 베네딕도는 명령과 관련해서, 그리고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문제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길 바란다. “평화와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수도원 내의 임명권은 아빠스의 재량에 맡기는 것이 유익할 것으로 본다” (RB 65,11). 참된 착한 목자는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목자직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착한 목자는 단 한 사람의 인물과 동화되고 하나가 된다. 양을 치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양을 치며, 그들 안에서 그분의 음성이 들리고 그들 안에서 그분의 사랑이 깃들어 있다.”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한 분이신 것처럼 수도원에서도 목자는 아빠스 한 사람뿐이다.

 

그렇지만 목자로서의 아빠스는 결코 베네딕도회 체제 안에서 무소불의 권력이 있는 절대 군주가 아니다. 성 베네딕도는 아빠스를 목자로 그리되 그저 평범한 목자로 그리지 않는다. “아빠스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산에 남겨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 그분은 그 양을 당신의 거룩한 어깨에 메고 양의 무리로 다시 데려다 주실 만큼 그 양의 연약함에 동정이 극진하셨다” (RB 27,8-9). 이와 같이 자기 양떼를 버려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는 베네딕도가 바라는 참된 지도력의 열쇠가 된다.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RB 2,32). 베네딕도가 중심을 두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여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이다. 획일적인 대우는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목자로서 아빠스는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잘 돌보는 어질고 인자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2) 치유자요 의사 (medicus)

 

규칙서에서 목자의 이미지는 이해심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끄는 아빠스의 두 번째 이미지로 더욱 보강된다. 그것은 바로 치유자 또는 의사라는 이미지이다. 구체적으로 수도 형제 개개인을 볼 때 베네딕도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주의자이다. 흔히 말하는 대로 ‘어느 가정이든지 십자가가 있다’는 말은 수도원에도 해당된다. 수도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약점과 결점이 있는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베네딕도는 감추지 않는다. 성 베네딕도는 어떤 형제들은 수도생활의 이상에 따라 살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수도 생활에 흔들리고, 또 착한 일의 도구들을 잘 이용하지도 않으며 불순종하기도 하고, 또 식사나 기도 시간에 늦게 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직시하고 있다. 이런 약한 사람들은 공동체의 걸림돌이나 짐이 아니다. 수도원은 성인(聖人)들이나 천사들의 사교장이 아니므로 여러 면에서 부족한 것을 치유하는 공동체이다. 다시 말해서 수도원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을 자신이 두루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신의 장점을 키워 나가고 약점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사람들이 터득하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아빠스는 의사요 치유하시는 분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우선 베네딕도는 RB 64장에서 아빠스의 모습을 부드럽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띠어야 함을 말한다. 베네딕도는 아빠스에 대하여 “부산떨거나 소심하지 말라” (RB 64,16)는 말과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려서는 안된다” (RB 64,13)는 충고를 하면서 이사 53장의 ‘야훼의 종’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성서 인용의 핵심 내용은 깊은 ‘동정심’ (compassio)이다. 이 영적 동정심이 영적 지도력의 핵심이다. 이 핵심 내용은 베네딕도가 야고 2,13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superexultat autem misericordia iudicio)를 간접적으로 인용하면서 아빠스 자신도 같은 자비를 받게 할 것이라는 권고로 강화되었다 (RB 64,10). 그러고는 이 핵심 내용은 다시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버릴 것이다” (창세 33,13)라고 말한 야곱의 분별의 지혜로 보강된다 (RB 64,18).

 

이런 영적 동정심을 바탕으로 해서 아빠스는 연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유능한 외과 의사처럼 행동한다. 이와 같은 지혜로운 의사로서 아빠스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형제들의 약점과 과실을 다룰 때 부각된다. 베네딕도는 상처를 치유하는 의사로서의 아빠스의 역할을 “의사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고 병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마태 9,12)는 성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뚜렷이 강조한다 (RB 27,1).

그래서 아빠스는 자기가 이끌고 있는 이들이 누군지를 잘 아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가 이런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유일한 이유는 우선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빠스는 자신의 약점을 항상 바라보아야 한다” (RB 64,13). 베네딕도가 말하는 장상의 모습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지도자나 장상을 생각할 때 내가 못하는 것을 완전히 하는 사람, 나에게는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 나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하는 사람으로 본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자기 투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베네딕도가 말하는 아빠스는 이른바 ‘슈퍼맨’(superman)이나 성인 (聖人)이 아니라 “자기나 남의 상처를 고칠 줄 아는” (RB 46,6)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정직할 뿐 아니라 아빠스 자신에 대해서도 정직하라는 요구이다.

 

아빠스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병자를 치유하는 의사처럼, 연민과 자비로 잘못한 이들과 파문당한 이들을 특별히 배려한다. 특히 아픔이 크고 치료가 어려울 때 그렇다.

 

특히 이런 치유 임무와 관련해서 베네딕도는 아빠스 혼자 이 짐을 진다고는 하지 않는다. 아빠스는 다양한 처방책을 마련해야 하고, 이 처방책에는 아빠스에게는 없는 수완을 발휘할 줄 아는 다른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아빠스는 현명한 의사와 같이 모든 방법을 사용해야 하며 ‘센펙타’, 즉 연로하고 지혜로운 형제들을 보내어 흔들리는 형제를 거의 남모르게 위로하게 하고 겸손되이 보속할 수 있도록 권유하며, 지나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그를 위로하게 할 것이다" (RB 27,2-3). 곧 원숙하고 현명한 형제들인 ‘센펙타들’ (Senpectae)을 흔들리는 형제에게 보내면서, 아빠스는 혼자서 처리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발견하는 원숙한 지혜와 성숙에 의뢰한다. 잠 많은 형제가 핑계되지 못하도록 하느님의 일을 위해 일어날 때 형제들은 서로 조용히 깨워준다 (RB 22,8). 또한 보속하는 자는 ”아빠스와 공동체 앞에 나와야 한다“ (RB 46,3).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가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한 수도승이 파문을 받기 전에 장로들이 사적으로 그를 찾아가 두 번 충고한다. 그러고 나서 필요시 공적으로 책벌한다 (RB 23). 이처럼 공동체 전체가 아빠스와 함께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에게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네딕도는 RB 28장에서 괴로울 정도로 성장이 무디고 도무지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치유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나열한다. 우리는 아빠스와 공동체의 지극한 염려를 본다. 아빠스는 자기를 치유시키기 위한 배려에 반응이 없는 형제에게 열심히 다가간다. 아빠스는 “권유의 기름을 발라주고 성서의 약을 사용하며, 마지막으로 파문이나 태형의 불지짐을 사용할 것이다” (RB 28,3). 여기서 당시 질병을 고치는 방식에 결부하여 치유의 영적 도구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점차로 더 강한 방법을 써도 모두 실패하면, 아빠스와 공동체는 더 강력한 방법인 기도를 통해 주님 친히 그 형제를 치유하시도록 간구한다 (RB 28,4).

 

이것마저 실패하면 아빠스는 비로소 다른 종류의 외과 기구를 집어 들어야 한다. “아빠스는 절단의 칼을 사용할 것이니... 병든 한 마리의 양이 온 양떼를 전염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RB 28,6-8).

이처럼 장상은 수도 공동체에서 여러 방법을 써서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사랑을 나타내고 실천함으로써 약한 형제가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재촉한다. 사실 오늘날 이 역할은 더더욱 수행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누구나 남에게 좋은 말을 하기는 쉽지만, 쓴 말을 하기는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렵고 껄끄럽기에 대개 꺼리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없을 때 공동체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아빠스는 개인과 공동체의 선을 위한 것이라면 형제들의 생활에 개입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인생에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시기가 온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들을 개인이 기대할 수 없거나 또는 시도할 용기가 없을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동정적이면서도 객관적인 분별을 해줄 아빠스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3) 청지기

 

아빠스에 관한 목자와 치유자라는 이미지는 매우 이상적으로 보이는 데 비해 청지기라는 말은 매우 구체적이고 철저히 실천적이다. 베네딕도의 주된 관심사는 영혼들에게 대한 관심이므로, 그는 아빠스에게 이런 관심을 소홀히 다룰지도 모를 “덧없는 현세의 일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지 말라고 명한다. 그래서 주된 관심사 외의 것은 권한 위임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맡긴다. “수도원의 재산, 기구들이나 의복들이나 그 밖의 다른 물건들을 위해서 아빠스는 생활과 품행이 믿을 만한 형제들을 뽑아,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그들에게 각 물건들을 맡겨 보관하고 걷어 들이게 할 것이다" (RB 23,1). 그래서 청지기로서 아빠스의 이미지는 형제들의 행정적인 문제와 수도원의 관리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제때에 자기 동료 종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준 착한 종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잘 관리할 것이니 (ministraverit), 말씀하시기를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주인이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RB 64,21-22).

 

그러나 베네딕도는 물질적 재화 따위는 중요하지 낫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만일 누가 수도원 물건을 더럽게 다루고 또 소홀하게 다루거든 책벌할 것이다” (RB 32,4; 46,1-4 참조). 수도원의 재산과 사업은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사유 재산보다 훨씬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청지기로서 아빠스는 동등한 종들로서 다른 형제들을 바라본다. 그래서 위임이 가능하다. 원장, 십인장, 당가, 문간지기, 병실 담당자 등에게 자신의 직무를 나눠준다. “만일 공동체가 커지면 그들 중에 평판이 좋고 생활이 거룩한 형제들을 뽑아 십인장으로 세울 것이다... 십인장으로 뽑힐 사람은 아빠스가 안심하고 자기 짐을 나누어 맡길 사람이라야 한다” (RB 21,1-3). 이것의 원칙은 이렇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며, 항상 지혜로운 사람들이 지혜롭게 관리해야 할 것이다 (amministrare)” (RB 53,22).

 

베네딕도가 사용하는 목자, 치유자, 청지기 직무 가운데 마지막 청지기만이 진실로 위임이 가능하다. 목자는 한 사람 이상 있을 수 없고, 병자를 치유하는 일도 대단히 미묘해서 함께 나누어 할 수 있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그에 반해 청지기 직분은 함께 나눌 필요가 있다.

 

맺는말

 

아빠스는 그리스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성사(Sacramentum)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수도 형제들은 아빠스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한다. 그 만큼 아빠스의 짐은 무겁다고 할 수 있겠다. 목자로서, 의사로서, 그리고 청지기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아빠스는 그리스도의 이콘(Icon)으로 몫을 다한다.

그래서 다른 수도회와 다른 베네딕도회의 특징은 아빠스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그 만큼 아빠스의 책임과 역할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른 형제들이 아빠스를 신앙으로 바라보고 순명하는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또한 아빠스를 위한 기도도 절실히 필요하다.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